명청시대의 천주교 조사입니다.
- 최초 등록일
- 2013.06.02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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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사 시간에 발표했던 명청시대의 천주교의 전래에 관한 내용입니다.
4장으로 구성 되어있으며, 중요 인물들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목차
Ⅰ. 명나라 시기 천주교
1)마태오 리치의 포교
2)명말의 포교
Ⅱ. 청나라 시기 천주교
본문내용
원나라 멸망 후 그리스도교가 중국 역사에 재등장하게 된 것은 17세기 명 말에 들어온 예수회 1540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등과 함께 파리에서 창설한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
가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이전시대의 천주교는 중국과의 교역 확대와 새 왕조의 설립에 따른 부수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면, 명대의 예수회의 중국 진출은 순수하게 선교를 목적으로 천주교에서 중국으로 선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들어와 중국 문화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자 노력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중 략 >
청나라 초기에 예수회는 큰 어려움 없이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특히 순치제와 아담 샬 신부와의 관계는 무척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제사문화와 공자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부터 불거진 전례논쟁은 17세기 중국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와 유교의 의례 사이에 있었던 갈등일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났을 때 오는 알력과 충돌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논쟁은 1640년에서 1742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몇 개의 수도회가 관련이 되어서 논쟁은 더욱 길어졌다. 논쟁이 불거진 후 강희제와 교황사이에 3차례에 걸쳐 교황사절이 오고갔는데 첫 번째 서신에서는 조상제사와 공자에 대한 제사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분노한 강희제는 사신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후 강희제는 마태오 리치의 관례를 존중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는 종신에 처하고 중국의 의례를 공식적으로 거행하겠다는 조건에 서명해야 거주증명서를 주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