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의 생애
- 최초 등록일
- 2013.06.10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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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선생의 성장과정
주시경 [周時經, 1876.12.22~1914.7.27]
호는 한힌샘이다. 흰 샘물이라는 의미로써 근대 국어 연구의 아버지로 일컫는 주시경은 1876년 11월 7일(고종 13년)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룽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주면석은 과거 시험에 거듭 실패하면서도 여전히 꿈을 버리지 못한 선비로, 가계는 돌보지 않고 한서에만 매달렸다. 그래서 그가 누이와 형 밑으로 태어날 무렵에는 가난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른두 살, 어머니는 스물아홉 살로 아직 한창나이였지만, 생활고에 찌든 어머니는 건강을 크게 상하여 젖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갓난아기에게 마음을 쑤어 먹일 쌀도 넉넉지 않아 아기는 영양실조에 걸려 기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주시경은 매우 영리한 아이로 성장하였다. 둘째 아들로 작은아버지 주면진(周冕鎭)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887년 6월에 상경하였다.
<중 략>
하지만 1945년 8월 17일 각각 무죄가 선고되면서 광복으로 모두 풀려 나왔다. 이에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마침내 <한글 맞춤법통일안> 이 제정되었다.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주어졌다.
김두봉(1890~?)과 김윤경(1894~1969), 최현배(1894~1970)등의 제자를 살펴보면, 김두봉은 경남 출생으로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중앙 보성 휘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앗다. 주시경의 애제자였던 그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힘을 쏟고 조선어학회를 만드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지만, 3.1 운동 뒤 상하이로 망명하고부터는 민족해방운동의 수단을 국어연구에서 무장투쟁으로 바꾸었다. 해방되기까지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며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민족혁명당 상무위원, 연안청치학교 교장, 조선 독립동맹 주석 등을 지냈고 해방 뒤에는 평앵으로 들어와 북조선인민위원회부위원장, 북조선노동당 위원장, 북조선인민회의 의장겸 상임위원장, 북조선인민회의 의장 겸상임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활동에 주력하다 58년 김일성의 ‘반종파투쟁’ 당시 노동당에서 제명됬다. 8일 추모의 밤에도 그의 사진은 내걸리지 않았다.
참고 자료
나라사랑 4―주시경특집호―(1971. 9.)
주시경선생전기(김윤경, 한글 126, 1960. 2.)
(박종갑) 주시경 문법의 문법 모형 연구(1) -국어문법을 중심으로- 논문 참조.
조선어 학회 (2011연대한국학교5-1)
1990년 10월 9일 한겨레 뉴스 라이브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