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선덕여왕과 무측천
- 최초 등록일
- 2003.01.18
- 최종 저작일
- 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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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서론
◎ 본론
⑴ 선덕여왕(善德女王)과 무측천(武則天)
⑵ 선덕여왕(善德女王)과 무측천(武則天)의 황제등극 전(前)
⑶ 황제등극 후(後)의 그녀들의 정치
⑷ 그녀들이 남긴 업적(業績)
⑸ 그녀들의 사후(死後)
* 선덕여왕과 무측천에 관련된 설화
◎ 결론
* 참 고 *
본문내용
선덕여왕에 대해서는 왕위에 오르기 전의 기록은 거의 남겨지지 않았다.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여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명민하였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이 배경이 되었는데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이유는 골품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진평왕이 승하했는데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진평왕의 딸인) 덕만(德曼:선덕여왕)을 왕으로 세웠다"라고 썼고, 일연 역시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성골의 남자가 없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했다"고 쓴 이래 이 설명이 정설이 되어왔다. 한 마디로 선덕여왕은 성골의 핏줄 때문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선덕여왕이 단지 성골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능력으로 국왕이 되었음을 전해준다. 또한 《삼국사기》와는 달리 진평왕의 장녀가 아니라 차녀라고 적고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에게는 천명(天明)이라는 언니가 있었다. 천명공주가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한 것을 선덕이 적절히 이용해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위에 오를 당시 선덕여왕의 남편은 김용춘이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용춘에게서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자 즉위 후에는 흠반과 을제가 보태져 남편이 세명으로 늘었다. 이는 삼서제도를 따른 것이다. 삼서제도란 왕녀가 자식을 가지지 못할 때, 남편을 셋을 얻게하는 신라의 전통적인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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