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중남미이해 리포트(칼로의 생애 및 작품들과 그 의의)
- 최초 등록일
- 2013.09.09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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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모두에게 쉽게 허락된 건강과 사랑과 아이조차도 그녀는 평생을 통해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역설적이게도 ‘평화(프리다 칼로)’ 이다.
나는 그녀를 고등학생 시절 미술사 관련 책을 통해 처음 접했으며 그녀의 강인한 외모와는 달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초현실주의적이고 자아 탐구적인 작품들에 매료됐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을 ‘초현실주의적이다’ 라고 일컫지만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초현실주의적이 아닌 있는 그대로 나를 보이는 대로 표현한 것’ 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렇듯 그녀는 그녀만 볼 수 있고 그녀만 표현할 수 있는 세계를 뛰어난 작품으로 표현했다. 어떻게 그녀는 보이는 그대로인 자신의 모습을 초현실주의를 가미하여 독창적인 작품으로 그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녀의 생애와 깊은 관련이 있다.
<중 략>
<짧은 머리를 한 자화상>
칼로와 리베라가 이혼 한 후 칼로가 그린 그림.
그림 상단에는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면 그 긴 머리카락 때문이에요. 이제 당신은 머리카락이 없으니 난 당신을 더는 사랑하지 않소.’ 라는 멕시코 노래 가사가 적혀있다. 이 그림을 완성하고 얼마 후 칼로는 리베라와 화해하고 재결합했으며 1954년 칼로가 사망할 때까지 같이 살았다
이혼 한지 1년 후 미국에서 수술을 마친 칼로에게 리베라가 다시 찾아왔고 그들은 재결합했다. 칼로는 그림을 계속 그렸고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뉴욕과 파리 전시 이후 국제적으로도, 국내에서도 명성이 쌓여갔다. 이즈음 늘 그녀를 괴롭혔던 척추 통증이 가속화 되어 지옥과도 같은 육체적 고통이 계속 되었다.
1940년대 말부터 건강이 악화된 칼로는 결국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만 했고 몇 차례의 척추 수술은 실패를 거듭했다. 칼로는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으며 휠체어에 기대 간신히 앉아있을 수 있었다.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칼로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참고 자료
네이버 캐스트 프리다 칼로
EBS e채널 프리다 칼로
웹툰 핑크레이디 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