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정권시대 문인들
- 최초 등록일
- 2013.10.24
- 최종 저작일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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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01.무인정변 발생원인
02.무인정권 시기구분
03.무인정권 역사적 평가와 문인등용 배경
Ⅱ.무인정권하의 문인들
01.당시무인들의 성향과 역할
02.이규보
03.이인로
04.김극기
05.기타문인들
Ⅲ.결론
01.결론
본문내용
무인란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대체로 전통적인 해석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것은 조선 초기 역사가들이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무신에 대한 문신의 차별 때문에 무인란이 발생했다는 평가였다. 또한 그들은 무인란으로 성립한 무인정권을 고려사회 변동의 일대 분수령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평가는 무인정권 이후를 문란하고 혼란된 사회로 서술하면서, 그러한 혼란을 수습한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려는 당시 사대부 세력의 정치적인 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무인란 발생의 원인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근대 역사학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발생 원인을 고려 전기 사회의 내부 모순에서 찾으려는 다소 진전된 시각을 보여주기는 하나, 그러한 내부 모순의 계기를 역시 문반·무반의 대립구조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 략>
무신 정권에 참여한 문인은 의종조에 좌천 및 파면당했던 문인, 현실비판적인 문인,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문인과 정종의 측근 세력으로서의 문인등을 들 수 있다. 의종조에 좌천된 문인으로서 문극겸이 있다. 궁인 무비등을 참하도록 상소하였다가 좌정언에서 외직인 황주 판관 으로 쫓겨났다 이공승은 의종조에 정함의 고신장에 서명하지 않아 파면된 적이 있다. 함유일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의종조에 성황신이 있는 사에 절을 하지 아니 하였다고 하여 파면되었다. 의종조에 현실 비판적인 자세 때문에 살아남아 무신 정권에 참여한 경우로는 김신윤, 민식 등이 있다. 김신윤은 착취와 아첨이 난무하는 충습을 개탄하였고, 민식은 방광하여 언행에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다. 민식은 비록 명종조에 있었던 일이지만 그의 언행을 통하여 의종조에서도 얼마나 현실 비판적인 면이 있었던가를 추측할 수 있다.
<중 략>
그는 계림 출신이지만 본관은 김해로 추측된다. 그는 대체로 명종 초년경에 급제하여 그의 나이 40대 후반인 1180년대 말에 비로소 의주 방어판관에 기용된 후 명종에 의해 직한림원에 탁용되었다. 그는 1199년 이후 잠시 동북면병마사의 속관으로 파견되었다가 다시 청요직에 복귀한 후 이부·형부를 거쳐 1203년 금에 가는 수제관에 임명되었다. 그 후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나 그의 문학적 재능으로 보아 다시 한림원이나 예부에 재직했다가 1209년에 졸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