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서학의 개념과 수용 배경
1. 통일신라시대
2. 조선시대
Ⅲ. 시기별 전개양상
1. 접촉기
2. 탐구기
3. 실천기
4. 탄압기
Ⅳ. 유학자들의 서학에 대한 인식
1. 성호학파의 양극적 전개
2. 신서파와 공서파의 서학관
Ⅴ. 맺음말 : 조선후기 사상사에 미친 영향과 한계
본문내용
Ⅰ. 머리말
조선에 서양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국을 통해서였다. 동양적 국제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에 서양은 새로운 존재였으며 중국에서 유입되고 있던 서학(西學)은 기존의 지식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것이었다. 17세기 이후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양에 대한 관심이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지식 역시 축적되어 갔다. 그러나 그 내용이 이질적이었지만 학문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가면서 서학지식을 기존의 사상계 내에 위치하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요청 될 수 밖에 없었다.
서학의 수용문제는 조선후기의 사상계가 당면한 중요한 과제로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 략>
이 토론은 전통사상을 대표하는 이가환과 가톨릭 사상을 대표하는 이벽의 토론으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첫째, 조선후기 전통사상은 새로 도입되는 천주교 사상에 대해 다만 사상적 이질성을 넘어서 국민 신앙을 밑뿌리부터 뒤집어엎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둘째, 천주교는 그것으로 세상(조선후기의 사회)을 변혁시키려 한다고 인식되고 있었으며, 셋째로, 비록 천주교 교리가 훌륭하다고 참되다 할지라도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조선후기 천주교의 전래는 조선사회 지도이념의 근본에 대한 도전이며 이 도전은 큰 갈등과 불행(즉 박해)을 가져다 줄 것임을 예측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과연 이가환의 이 예측은 백년간의 천주교 박해로 현실화 되었다.
유학자들의 상반된 의식은 조선 서학이 북경의 선교사들이 천주교 교리와 서양의 새로운 과학기술문명을 서학서를 통해 동시에 전한 것을 수용하였던 까닭에 유학자들인 조선 서학자들은 종교와 과학 기술의 학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하여 전체로 파악하는 서학관을 가졌다. 서학은 결국 과학기술의 서학으로 서학의 기적측면을 정착시키지 못했으나, 윤리와 종교의 리적측면(理的側面)인 서교신앙, 즉 천주교 신앙을 조선사회에 수용하게 하였다. 서학이 기적측면(器的側面) 즉 과학기술의 정착에 실패한 것은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사단시하고 박해할 때 서학의 기적측면까지 배척하였기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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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