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정치도감의 설치와 활동
1. 설치 배경
2. 정치관들의 개혁활동
Ⅲ. 정동행성과 정치도감의 충돌
1. 정동행성과 충돌
2. 정치도감의 폐지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고려가 원의 간섭에 들어간 이후, 많은 방면에 있어서 큰 변화를 겪었다. 그 중에서 정치적인 변화로서는 부원배의 등장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이 논문에서 살펴볼 정치도감(整治都監)과 정동행성(征東行省) 역시 그러한 변화의 일부이다.
이 논문에서 다룰 ‘정치도감(整治都監)’ 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황제의 지시로 설치되어 고려의 개혁을 담당하였던 것과 고려의 내정개혁의 측면으로 보았다. 박종기는 충목왕대의 성리학적 개혁론을 충렬·충선왕 이래 원 간섭기의 사회적인 현실에 비추어, 당시의 개혁론의 연장선상에서 충목왕대의 개혁정책을 보았고, 당시 개혁주체가 새롭게 대두된 성리학에 기초한 정책을 실시했다고 보았다. 민현구는 정치도감의 12가지 개혁안을 조목별로 분석하였고, 정치관(整治官)들의 활동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박종기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정치도감에서 개혁을 주도했던 세력을 유교적 소양을 가진 지식인층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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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감의 개혁정치에 대해 신예의 경우처럼 압량위천과 관련하여 그의 동생인 순에게 장형을 가하거나 기황후의 친족인 기주가 도망가자 잡아 오는 등의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러나 기삼만의 옥사사건으로 인해 정동행성이문소에서 간여하게 되었으며 심한 반발을 했다. 정동행성이문소에서 정치관이었던 좌랑 서호와 교감 전록생을 가두었으며, 10월 정동행성이문소에서 밀성부사 이손경·여흥부사 이몽정·서주부사 조동휘를 환관·권세지가의 전장을 회수했다는 이유로 가두었다. 또한 기삼만이 옥사하자 그의 처가 정동행성이문소에 고소하였다. 이문소는 담당 정치관을 잡아 가두게 되었고, 부원세력의 이익을 옹호하던 정동행성이문소가 기삼만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도감의 활동을 정지시켜버린 것이었다. 이후 정치관들은 구속되었고 원의 사자에 의해 국문당하고 장형에 처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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