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時代 在銘 金銅佛像 硏究
- 최초 등록일
- 2013.11.22
- 최종 저작일
-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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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고구려 재명 금동불상
1. 고구려 재명 금동불상의 양식
2. 고구려 재명금동불상의 편년 해석
Ⅲ. 고구려 재명불상의 조성의미와 신앙적 특징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현재 명문이 확실한 고구려 금동불상은 연가 7년명 금동불입상, 경4년명 금동삼존불입상, 영강 7년명 금동불 광배 등 모두 3점이다. 그 외 불확실한 계미명 금동삼존불입상과 건흥5년명 금동석가불 광배 2점이 있다. 그러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고구려 연호, 불명확한 글자, 이동이 가능한 소금동불의 제작 장소와 발견 장소가 다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명문 분석에 문제점이 있다.
본 발표에서는 고구려 재명 금동불상을 도상 형식과 양식적 특징, 명문 등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도상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고구려 재명 금동불상
1. 고구려 재명 금동불상의 양식
(1)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고구려는 장수왕(413-491) 때 대제국으로 안정기를 맞이하여 남으로는 죽령에서 남양만 선까지 북으로는 요하 이동의 만주 전역에 이르기까지 광막한 영토를 갖게 되었다. 이후 문자왕(492-518)부터 양원왕(545-558)까지 안정된 시기로 문화가 고도로 꽃피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를 잘 반영한 불상이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이다. 이 불상의 발견지는 경상남도 의령이라는 점에서 출토지와 실제 제작국이 서로 달라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광배 뒷면에는 긴 명문이 새겨져 있어 초기 조각사에 중요한 자료되고 있다.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도1)은 臺座, 佛, 光背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전체 높이는 16.2cm이다. 얼굴은 원만상이고 나발을 갖추고 있으며, 손은 시무외 여원인이다. 가사는 옷자락을 왼쪽 손목에 걸쳐 내렸으며, 가슴을 U자꼴로 넓게 터지게 하여 비스듬히 입은 승각기가 보이도록 했다. 이같은 복장은 북위시대 불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서 이 착의 방식은 중국식 복장이 불상에 적용되기 시작한 남북조 450년경부터 보이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운강석굴의 담요(曇曜)5굴 가운데 16굴 불상이 460년대에 이미 복장 혁명이 남북조에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연가 7년명 불상은 U자 주름이 뚜렷하며 좌우로 옷자락이 넓게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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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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