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대외관계 (청 / 일본)
- 최초 등록일
- 2013.12.01
- 최종 저작일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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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청과 일본과의 대외관계
목차
Ⅰ. 청
1. 호란 이후 청과의 정치/외교적 관계
2. 대외무역
Ⅱ. 일본
1. 대외교섭의 재개
2. 조선통신사의 파견
3. 대외무역
4. 울릉도와 독도 문제
본문내용
Ⅰ. 청(靑)
: 여진족은 거주 지역에 따라 건주, 해서, 동해로 구분되었다. 이들 중 건주여진은 세조 13년(1467), 성종 10년(1479) 두 차례에 걸친 토벌로 인해 오랫동안 교섭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 건주여진 출신의 누르하치가 여진 부족을 통일하게 되고, 후금을 건국하게 된다.
1) 정묘호란 : 후금은 명을 정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전쟁을 벌인다. 혼란스러운 명?청 교체기 조선에서는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후금과 큰 마찰 없이 지냈다. 하지만 뒤를 이은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표방하고 또 요동반도를 수복하려던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明)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鐵山)의 가도(?島)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는 등 배후의 조선이 위협적인 행동을 함에 따라 후환을 없애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였다.
<중 략>
- 막부 장군의 승습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승습을 알리는 ‘관백승습고경차왜(關白承習告慶差倭)’를 조선에 파견,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통신사청래차왜(通信士淸來差倭)’도 파견. 조선에서는 예조의 논의를 거쳐 통신사 파견을 결정, 부산 초량 왜관에 알려 대마도에 통보.
-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면 대마도에서 파견된 ‘신사영빙차왜(信使迎聘差倭)’의 인도를 받아 대마도에 도착, 이 후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장군이 있는 에도까지 왕복하였다가 임무를 마치고 대마도로 돌아오면 그곳에서 부산까지는 다시 대마도주가 임명하는 ‘신사송재판차왜(信使送裁判差倭)’가 안내하여 무사히 사행을 마치도록 함.
⑤ 정례화된 조선 통신사
- 명칭이 통신사로 바뀐 이후에는 원칙적으로 조선 국왕이 일본 장군에 파견한 사절로 들은 조선국왕의 국서로 예물을 지참하였고, 명칭을 조선 통신사로 정함.
- 사절단의 삼사(正使·副使·書狀官)는 중앙의 관리를 임명했으며, 막부 장군의 습직이나 양국 간의 긴급한 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되었으나 대부분이 장군습직의 축하였음.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