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다시 보기에 대한 글입니다. 당당히 A+ 받았습니다 참고바랍니다
- 최초 등록일
- 2013.12.10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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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 격랑 속 광해군 - 내가 왜 광해군에 주목하는가
Ⅱ. 광해군의 생애
1. 즉위 전 상황 그리고 임진왜란∙
2. 전후 복구 상황
3. 화려한 외치(外治)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 - 폐모살제(廢母殺第)
Ⅲ. 광해군에 대한 다양한 시각
1. 떠오르는 광해군, 그 불편한 진실
2. 광해군 :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
Ⅳ. 그렇다면 나는 광해군을 어떻게 보는가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 격랑 속 광해군 - 내가 왜 광해군에 주목하는가
얼마 전 친구와 함께 이병헌 주연의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를 보았다.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 때문에 항상 암살의 위험에 시달렸던 그였지만 대동법으로 대표되는 민생안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치적 암투를 벌이는 광해군의 모습이 영화 속에 생생히 표현되었다. 영화 속 광해군은 전대의 어떤 왕보다 사대의 명분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공허한 유교 논리보다는 백성들의 삶에 더 큰 관심을 보였던 마음이 따뜻한 왕이었다. 물론 극적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분명 조선 시대 광해에 대한 평가를 고려했을 때, 이는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만큼 사후에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조선 후기까지 문인들은 사서나 문집에서 광해군을 혼군(昏君 : 어둡고 용렬한 국왕이라는 의미)이라 칭하였고, 그의 재위 기간을 혼조(昏朝 : 어둡고 혼란한 시대라는 의미)라 평하였다. 이는 일정정도 그가 행했던 여러 폐륜 행위에 기인하고 있다. 광해군을 쫓아낸 세력이 그 명분으로 제시했던 세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페모살제(廢母殺弟)’였다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일파가 이후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함에 따라 광해군 자체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그의 치세를 칭송하는 행위조차 금기시되었다. 광해군에 대한 충성을 노래한 <상부>라는 시를 쓴 유몽인은 ‘반혁명 세력’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하였고 이후 19세기까지 ‘섬길 가치가 없는 군주에게 헛되이 충성을 바친 가짜 백이(伯夷)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는 ‘반정’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찾아볼 수 있다. 반정은 『춘추』에 나오는 말로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撥亂世反諸正)’라는 의미이다. 이뿐만 아니라 인조반정 직후 서인이나 남인들이 반정이 성공한 것을 일러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拜國再造之慶)’라고 평한 것이나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윤리가 다시 맑아졌다'라고 평가한 것 등을 통해 그 당시 광해군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한명기(1988), 「光海君代의 大北勢力과 政局 動向⌟,『韓國史論』20
한명기(1998), 「폭군인가 현군인가 - 광해군 다시 읽기」, 『역사비평』44호
한명기(2000), 『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역사비평사
한명기(2000), 『광해군』, 역사비평사
한명기(2002), 『한국사 시민강좌』, 일조각
오항녕(2010), 『조선의 힘』, 역사비평사
오항녕(2012),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KBS, <한국사 傳, 명분인가, 실리인가? 고독한 왕의 투쟁 광해군>, 2008년 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