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b>고구려</b>
1. 성립과 발전
2. 영토확장과 전성기
3. 수·당나라와의 투쟁
4. 정치제도
5. 사회·경제
6. 문화와 교육
7. 국사편찬
8. 시가와 음악
9. 미술
10. 불교
11. 도교
12. 풍속
13. 고구려의 멸망
<b> 백제의 성장과 일본진출</b>
1. 百濟의 淵源과 成長
2. 百濟의 日本進出
<b> 신라 귀족의 출현과 영향</b>
Ⅰ. 부체제의 변화와 귀족의 출현
1. 신분체계의 차이
2. 귀족의 출현
Ⅱ. 신분구조와 귀족
Ⅲ. 귀족의 존재양상과 권력구조의 변화
Ⅳ. 신라귀족의 특징과 영향
본문내용
1. 성립과 발전
전설에 따르면 B.C. 37년에 주몽(朱蒙)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佳江:渾江)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통구(通溝)로 옮긴 뒤 낙랑군(樂浪郡)과 임둔군(臨屯郡)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漢族)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이후 현도군(玄郡)의 지배권 안에 있었으나 태조왕(太祖王:재위 53∼146) 때부터 강력한 대외발전을 꾀하였다. 태조왕은 현도군을 쳐서 무순(撫順) 방면으로 축출하였고, 요동군(遼東郡)과 낙랑군(樂浪郡)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으며, 임둔군의 옛 땅에 자립한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왕위의 형제상속제를 확립하여 고대국가체제를 갖춤으로써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다.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 179∼197)은 왕위의 부자상속제(父子相續制)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동천왕(東川王:재위 227∼248) 때는 중국의 위·오(吳)·촉(蜀) 3국의 대립시기였는데, 이때 동천왕은 요동군의 실권자 공손 연(公孫淵)과 통교하고 위나라를 견제하는 등 국제적 안목을 넓혔으나, 242년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다가 관구 검(丘 儉)의 반격을 받아 서울인 환도성(丸都城)까지 함락되었다. 봉상왕(烽上王) 때는 선비족인 전연(前燕)의 모용 외(慕容?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년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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