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의 형성
- 최초 등록일
- 2013.12.23
- 최종 저작일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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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개화사상의 형성배경과 과정
2. 개화사상의 성격 및 주요 활동내용
3. 주요 개화사상가 업적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개화(開化)’라는 용어는 본래 <주역>에서의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에서 취한 용어로, 모든 사물의 지극한 곳까지 궁구(窮究), 경영하여 일신(日新)하고 또 일신해서 새로운 것으로 백성을 변하게 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뜻으로, 개화사상(開化思想)은 19세기 중엽의 민족적 위기를 당해 나라와 백성을 자주적으로 근대화하고 변혁해서 진보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개화사상의 원류가 되는 조선 후기 북학파의 사상은 당시 지배층의 전반에 흐르고 있던 낡은 사상에 비해 상대적인 진보성을 지닌 것이긴 했지만 아직 봉건제도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근대사상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북학파의 사상과는 달리 근대적 개혁사상으로서의 개화사상은 또 다른 역사적 조건하에서 움트기 시작하였다.
<중 략>
1884년 우정총국(郵政總局) 청사의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혁신내각을 수립하여 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前後營使兼左捕盜大將)직을 맡았으나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김홍집(金弘集)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1895년 3국 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김홍집파를 퇴진시키고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왕실과 일본공사로부터 배척당하고 고종 폐위음모의 혐의를 받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비공식으로 귀국, 사면되었고 이완용(李浣用)내각의 궁내부대신이 되었지만, 정부대신의 암살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국권피탈 뒤 일본으로부터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고 1911년 조선귀족회회장, 1918년 조선은행이사를 지냈다. 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중추원의장·일본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
참고 자료
초기개화사상연구, 이완재, 민족문화사, 1989
개화파와 개화사상연구, 이광린, 일조각, 1989
윤순갑, 국제화전략으로서 한말 개화정책 연구, 대한정치학회, 2001
한국근대사회사상사연구 : 신용하, 일지사, 1987
한국의 개화사상 : 강재언, 정창렬 역, 비봉출판사,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