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홍경래의 난
- 최초 등록일
- 2014.01.01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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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19세기 전반기 사회정세와 평안도
1) 세도정권 성립기의 중앙과 지방
① 세도정권의 성립과 그 성격
② 지방사회의 성장과 동요
2) 평안도 농민전쟁의 발생배경
2. 농민전쟁의 전개과정
1) 주도층의 형성과 농민전쟁의 준비
2) 농민군의 청천강 이북지역 장악
3) 정주성에서의 장기항전
4) 농민전쟁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책
3. 평안도 농민전쟁의 참가층 4. 평안도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9세기는 봉건제의 해체기인 동시에 근대로 옮겨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또한 잠채가 성하게 행하여진 것은 국내산업의 발전에 따라 금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기 때문으로, 봉건정부도 이를 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신흥 상인들은 이들 사영 광산을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운영하여, 차차 구래의 봉건적 특권상인과 이해의 대립을 일으켜 그들의 권익을 침해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이후, 상품 화폐관계의 발전, 18세기말 이후 극히 한정된 범위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의 요소가 발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18세기 이후가 우리 봉건적 역사의 최후의 시기인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동시에 또, 19세기와 18세기를 구별할 수 있는 근거를 부여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투쟁이 전례가 없을 만큼 급진화 하여 농민봉기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19세기 역사의 또 하나의 특징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농민봉기에 관하여는 봉건적 지배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킨 심각한 대규모 투쟁으로, 국내의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하였음과 민중의 거대한 역량과 투지를 보였다고 평하고 있다. 이 같이 평안도 농민전쟁은 조선봉건사회에 있어서의 가장 규모가 큰 반봉건적인 농민폭동의 하나이며, 그것은 또 12세기부터 19세기 전반기의 봉건사회가 내포하고 있던 모순의 전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 략>
그나마 정주성에서 관군과의 전투가 1백여 일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관군의 초토전술로 쫓겨는 농민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농민군의 지도부들은 자신들이 수세로 몰렸을 때, 비로소 농민대중과 올바른 결합을 통해 농민전쟁을 이끌어갔으나 이때는 이미 다른 지역과의 연결이 끊어진 고립된 상태로서 패배가 예견된 때였다. 또한 봉건사회의 모순을 서북민에 대한 차별의 문제로 축소시킴으로써 당시 봉건적 수탈에 허덕이고 있었던 삼남지역 농민들의 반봉건투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해버린 점도 농민전쟁이 가지는 한계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계를 지닌 농민전쟁이었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참고 자료
강만길, 도진순, 최장집, “한국사 10 - 중세사회의 해체 Ⅱ”, 한길사, 1994
한국역사의이해편찬위원회, “한국역사의이해”, 계명대학교출판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