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갑신정변 정리
- 최초 등록일
- 2014.02.12
- 최종 저작일
-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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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갑신정변(1884)
Ⅱ. 갑오 ․ 을미개혁(1894-1895)
Ⅲ. 동학농민운동(1894)
Ⅳ. 독립협회(1896)
Ⅴ. 신민회(1907-1911)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갑신정변(1884)
1. 서론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많은 피해를 받았고, 지리학적 위치 때문에 여러 열강들의 침입을 받았다. 갑신정변은 주권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주체성을 서서히 잃어가는 단계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나라에서 개화사상을 가진 이의 결단력을 보여준다. 외세의 영향력을 받음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보여주는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2. 본론
(1) 원인 및 배경
1882년 8월에 파견된 수신사 일행은 약 4개월 간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의 정치 지도자와 근대 사상가들을 만났다. 김옥균은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지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본정부도 국왕의 위임장이 있다면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고 약속하였다.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여 근대적 국민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일본의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기대하였다. 김옥균은 고종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에 갔으나, 약속받았던 차관을 받지 못했다.
일본과의 교섭에 실패한 후 개혁에 필요한 정치 자금의 확보가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친청 세력의 견제도 점점 심해졌다. 1884년에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하고 이를 위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던 군대의 절반을 철수시켰다. 이를 기회로 삼은 개화당 인사들을 일본 공사로부터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개화당 인사인 홍영식이 우정총국 총판으로 임명되고, 서재필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신설된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으며, 박영효는 광주의 수어청을 담당하는 등 정변을 일으키기 위한 기반이 조성되었다.
(2) 경과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은 1884년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고, 주조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밀의한 끝에 일본군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키고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기도하였다.
<이하생략>
참고 자료
http://seoul600.visitseoul.net/index.html
http://pijth.egloos.com/3757050
http://blog.naver.com/suede2000?Redirect=Log&logNo=40030898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