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량치차오의 역사관과 사학이론체계에 대한 글입니다.량치차오의 역사관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의 시각으로 중국의 근대를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목차
1. 서론
2. 량치차오의 역사관과 신사학
1)량치차오의 역사관
2)량치차오와 신(新)사학
3. 량치차오와 망국사학, 그리고 중국
4. 량치차오의 사학 연구 성과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평가
5. 결론
본문내용
흔히 18-19세기 한국과 중국, 일본을 포함하는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대라고 표현된다. 세 나라가 모두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았고 그에 따라 문호 개방이 요구되었으나, 그에 대한 대처 방식은 세 나라가 서로 달랐다. 급격한 근대화는 세 나라 모두에게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전통 왕조가 무너지거나 혹은 왕조의 유지 형태가 바뀌었으며, 급격히 서양 기술이 도입되어 그때까지의 그 어떤 시대보다 빠른 문화적 변화를 겪었다. 새로운 사상과 가치 체계들이 도입되었고, 전통사회의 것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특히 문호의 개방이 더뎠던 중국과 조선의 경우, 서구의 침략으로 인해 많은 경제적·문화적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자들은 나라의 부국강병과 중흥을 꿈꾸는 열망 아래 다양한 학문적 체계를 성립했다. 이는 역사학에서도 나타났는데, 이 글에서는 특히 중국 근현대에서 나타난 사학 사조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의 근대사회 도래에 따른 사학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중국 사학이 유가 경학의 지배로부터 탈피하였고, 사학의 사회적 작용(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과 그 독립적 지위는 날로 높아져 갔다는 것이다. 사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학을 민족의 애국심의 원천으로 만든 대표적 역사가가 바로 20세기 초 신사학을 창시한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이다. 그는 광서제와 함께 변법운동을 추진한 캉유웨이의 제자였으나, 유가적 역사학의 범주에서 진보관을 전용했던 캉유웨이와는 다른 역사관을 가졌다. 이 글에서는 량치차오의 역사관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의 시각으로 중국의 근대를 바라보고자 한다.
本論 1. 량치차오의 역사관과 신사학
1)량치차오의 역사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을 향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이 치열해짐에 따라, 지식인들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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