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신라촌장적에 관한 연구경향
- 최초 등록일
- 2003.06.03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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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신라장적의 연구동향
1. 문서의 성격과 작성연도
2. 신라촌장적과 촌의 성격
3. 공연의 성격
Ⅲ. 꼬리말
본문내용
서원경(현재 충북 청주)부근 4개 촌의 사정을 기록한 문서가 1933년 10월에 일본 정창원에서 화엄경론질의 파손 부분을 수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이 문서를 흔히 신라장적이라 불러왔다. 신라장적은 당현사해점촌과 당현살하지촌이 기록된 문서와 실명촌과 서원경□□자촌이기록된 문서 등 모두 2매로 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문서의 기재 순서에 따라 이들 촌을 A촌·B촌·C촌·D촌으로 불러 왔는데, 화엄경논질의 표지를 만들 때 B촌과 D촌의 문서는 끝부분이 잘려나갔고, C촌의 문서는 머리부분이 잘려나갔다. 문서의 크기는 가로 58cm 세로29.6cm정도이고, 저지로 되어 있다.
신라촌장적에 대해서는 1953년에 그에 대한 첫 논문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초기 연구는 일본학자들이 주도했다. 그 가운데도 기전외의 연구성과는 탁월한 것이어서, 이 분야 연구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986년에 나온 빈중승의 연구성과를 마지막으로, 일본학자들은 이 분야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대신에 1986년 이후에 한국학자들의 연구성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연구의 관심이 세분화되고 깊이를 더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연구성과의 증가가 이 분야의 연구에 합의점을 도출하기보다는 연구자마다 각기 다른 주장을 하게 되면서 오히려 차이점이 더욱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신라촌장적의 연구에서 차이점을 크게 노출시키고 있는 분야는 대략 3~4가지로 압축된다. 그 첫 번째로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부분은 신라촌장적이 언제 작성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촌장적의 작성연대에 대해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755년, 815년, 875년에 작성되었다는 주장이 있어 왔고, 그 가운데도 815년설이 다수설을 형성하였는데 최근에는 695년에 작성되었다는 강력한 주장이 제기되어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의견의 차이를 크게 보이고 있는 두 번째 분야는 촌장적에 기록된 촌이 일반촌인가 특수촌인가 하는 문제이다. 처음에는 일반촌이라는 입장에서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1970년 중반에 녹읍설이 제기되고 1980년에 왕실직속촌설이 나오게 되었다. 세 번째로 의견을 좁히지 못하는 분야는 공연과 호등의 구분기준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주로 문서에 보이는 공연이 자연호인가 편호인가 문제, 호등은 인정의 다과에 의해 구분되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재산의 다과에 의해 구분되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계연의 성격에 관한 의견차이 등이다.
본 고에서는 지금까지 문서와 관련된 미진한 문제들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고찰하여 통일신라 촌락지배장식의 일단을 밝히며 아울러 본 문서의 성격도 규명하고자 한다.
참고 자료
· 김기흥, <신라 촌락문서에 대한 신고찰>, 《한국사연구》64, 1989
· 이인철, 〈新羅村帳籍에 대한 몇 가지 論議〉《한국고대사연구》 21, 2001
· 한국사 9 통일신라, 국사편찬위원회,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