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광계토 대왕비
- 최초 등록일
- 2003.06.06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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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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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 광개토대왕릉비의 의의
1. 비의 발견과 조사
1) 사카와 쌍구가묵본(酒勾雙鉤加墨本)
2) 원석정탁본(原石精拓本)
3) 석회칠이 된 1918년경의 능비 모습
4) 석회가공탁본
5) 석회가공탁본의 '왜만왜궤'; 원석탁본상의 "왜?대궤"
6)최근의 대표적 탁본
2. 신묘년기사의 진상
3. 비문의 구성과 내용 및 성격
4. 한·일간의 역사관의 차이
§2. 광개토대왕 비에 대한 한·일간의 해석차이
1. 문제가 되는 부분.
2. 광개토대왕비가 보여주는 사실들 (4c말∼5C초)
§3.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廣開土大王碑의 의의
414년(장수왕2세)에 고구려 제 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리고, 수묘인연호를 명기해두기 위해, 국강상에 있는 광개토 왕릉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언덕(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세운 사면비석으로 일명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가 보여 주듯이, 광개토 대왕은 고구려 영토를 확장하여 동아시아의 제국으로 발전하는 극성기를 이룬 왕이었다.
비석은 이수가 없이 대석과 비신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석은 길이 3.35m. 너비 2.75m이고 비신은 너비 1.35m. 높이 6.39m에 이르는 동양최대의 비석이다. 비신의 4면에는 44행 1,775자의 문자를 10에서 15cm 정도의 크기로 음각 하였는데, 글씨의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모눈종이처럼 칸을 나누어 놓았다. 이 비석은 조형적 아름다움은 없으나 고구려 사 및 동아시아 교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비석이다.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멸망과 만주의 상실로 잊혀져 있다가, 조선 세종조에 편찬된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조선 전기의 문헌에서 언급되었지만 비문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참고 자료
[저서]
서길수 《고구려 역사유적 답사-홀본, 국내성편》사계절
이형구·박노희,《광개토대왕릉비신연구》,동화출판사,1986.
이진희 著, 이기동 譯《광개토대왕릉비의 탐구》, 일조각,1982.
왕건군 著, 임동석 譯《광개토대왕비 연구》, 역민사,1985.
김현구, 《임나일본부연구》일조각,1993
박성봉편,《고구려 남진 경영사의 연구》백산자료원,1995.참조.
임기중, 《광개토왕비원석초기탁본집성》 동국대출판부,1995
서영수 외,《광개토호태왕비연구 100년》 고구려연구회,1996
[논문]
이형구,박로희, 《광개토왕릉비문의 소위 신묘년기사에 대하여》(동방학지 제29호,1981)
서영수, 《광개토왕릉비문의 정복기사 재검토》 (역사학보 98,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