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열사
- 최초 등록일
- 2014.04.24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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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출생과 성장
2. 노인동맹단 가입과 사이토 폭살(爆殺) 의거
3. 서대문형무소 사형 순국
4. 강우규 의거의 역사적 의의
5. 역사를 돌아보며
본문내용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1855. 6 ~ 1920. 11)는 1859년 6월 5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 68번지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님 집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지만 어려서부터 용맹스러웠고 총기가 남달랐다고 한다. (송상도,『기려수필』,1966, 277쪽 참조) 특히 친형에게 한학을 공부하고 한방 의술을 전수받아 덕천에서 한방의를 개업하였다.
1883년 함경남도 흥원군 용원면 영덕리로 이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그는 홍원읍 남문 앞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재산을 모았고, 이를 토대로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 전파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誠齎) 이동휘(李東輝)의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 구국운동론에 감화되어 함경도 일대에서 민족교육과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역군을 양성하는 데 앞장섰다.
<중 략>
강의사의 법정에 임하는 태도는 당당하고 늠름해서 일본인 재판관들을 위압하였다. 재판관이 처음에 자기들 버릇대로 ‘피고(被告)는…’ 운운하며 해라 말을 쓰려하니 ‘이 죽일 놈들…’하며 꾸짖고 ‘너희들 일본인들은…’ 등 이렇게 호령하는 식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거가 하나님의 정의에 입각한 것이라고 열변으로 주창하면서 일본인들로부터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본인을 재판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처음에 강우규를 ‘피고’라고 부르던 일본인 판사가 의사의 인격에 압도되어 나중에는 ‘ 강 선생’이나 ‘영감님’으로 부르게 될 정도였다.
특히 그는 “이 재판은 너희 총독이 시켜서 하는 것인가, 너희 천황이 시켜서 하는 것인가. 내가 알기로 사이토는 세계 평화를 좀먹는 큰 죄인인데 왜 잡아다가 심문하지 않고 나만 이 궁지에 몰아넣는가”하고 항의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1920년 4월15일자 : 김창수, 앞의 논문, 서대문구청,2003, 69쪽에서 재인용.)
참고 자료
독립운동가열전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가열전. 1』, 서울 : 백산서당, 2005.
마한산, (다시읽는)독립운동가 24人의 생애와 사상(1998년-1999년) : 3.1운동 80주년 기념사업자료 수록, 서울 : 3ㆍ1운동기념사업회, 1999
오마이뉴스, 2002 11월 2일자 기사, <11월 29일, 노투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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