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학사 - 명대의 사학
- 최초 등록일
- 2014.05.03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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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사학사 명대의 사학사 정리 PPT와 발표문 입니다. 책은 신승하의 중국사학사 입니다.
이건 발표문 입니다. 11페이지..
목차
1. 명대 사회와 사학
2. 사관제도(史館制度)와 실록의 편찬
3.『원사(元史)』의 편찬
4. 명대 후기 개인의 사서 편찬
5.『영락대전(永樂大典)』과『명회전(明會典)』의 편찬
6. 왕세정(王世貞)과 이지(李贄)의 사학
7. 방지(方志)와 경제사(經濟史)
8. 민간 사학(民間史學)의 잡사(雜史) 필기(筆記) 소설(小設)
9. 농업, 약학, 기술서의 편찬
본문내용
1. 명대 사회와 사학
명대의 사회와 사학은 가정(1552~1566) 시기를 경계로 전·후기로 나눌 수가 있다. 태조 주원장은 명을 건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의 전제 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군정 대권을 독점하였으며 가혹한『대명률』을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금의위(錦衣衛)와 같은 특무기관을 두어 독재정치를 강화하였다.
사상적으로 태조는 정주 이학을 제창하여 강상명교로 백성들을 속박하였다. 또한 문자옥(文字獄)을 일으켜 글을 쓸 때 조금도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만약 벗어난다면 가혹하게 진압하였다. 그 다음의 성조는 이학가의 저술을 모아『성리대전(性理大全)』,『오경대전(五經大全)』을 편찬하고 이를 반포하여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 그리고 과거에서도 사서오경에서 문제를 내고 또한 팔고문(八股文)으로 답안을 쓰게 하였다. 이로 인해 독서인들은 공명과 이록(利祿)을 위하여 역사와 현실 문제의 연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문인들과 사관(史官)들의 입지가 어려워졌다.
명 초에 토지대장을 정리하면서 경제가 회복되고 발전되어 갔다. 따라서 경제적 번영으로 강한 국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변방의 개발과 해외 발전에도 주의하였다. 이 시기의 사학은 관에서 편찬하는 관수 사서가 늘어나『원사』와『명회전(明會典)』,『영락대전(永樂大典)』과 같은 큰 규모의 책들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체제는 진부하였고 독창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도 개작하였고 작자는 감히 평론을 첨부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개인의 사서는 보기 어려웠고, 있다고 해도 출사(出使)의 행기(行記)가 고작이어서 사학이 쇠퇴하였다.
명은 영종 이후에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정치면에서는 사대부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환경이 제공되었으나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여 토지 겸병은 더욱 심화되었고 부역과 세금, 지조는 갈수록 가중되었다. 사회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개혁이 필요했다. 이에 새로운 학술 사상으로 변혁을 촉진하여 왕수인(王守仁)이 양명학파(陽明學派)를 창립하였다.
만력 이후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서양의 철학과 실용 과학을 전해왔다. 이러한 전파는 학자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과학의 발달에 자극을 주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