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한국의 독도 영토인식
1)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독도 영토인식
2) 조선시대의 독도 영토인식
3) 20세기 이후, 오늘날 독도 영토인식
2. 일본의 울릉도 도해면허와 시마네현의 독도편입
1) 일본의 울등도 도해면허
2) 시마네현의 독도편입
3. 일본교과서의 독도 영토 서술과 일본의 우경화
1) 일본교과서의 독도 영토 서술
2) 일본의 우경화
4. 독도 수호를 위한 우리의 전략
참고문헌.
본문내용
1. 한국의 독도 인식
1)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독도 인식
독도에 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고려시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이다.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우산국을 정복하였으며,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고 되어 있다. 당시에는 울릉도와 독도(우산도)가 우산국이라는 하나의 독립국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후에 930년(고려태조 13년)에는 고려에 귀속되었다. 고려 인종 때와 의종 때에는 우산국에 관원을 파견하기도 했고,『고려사지리지』와『동국여지승람』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언급이 되어있다.
2) 조선시대의 독도 인식
조선 초기인 1417년에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을 우려하여 무릉도(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공도정책이 실시되고 2~3년마다 수토관을 보내어 섬을 관리하게 하였다. 1425년(세종 4년)에는 우산도로 호칭, 김인우를 우산·무릉둥처 안무사로 삼아 울릉도에 파견하였고, 1454년(단종 2년)에 완성된『세종실록 지리지』권 153에는 강원도 울진현조에 그 부속도서로써 우산도와 무릉도 열거하여 지리적으로 우리영토임을 명기하였다.
또 1469년(성종 1년)에 삼봉도로 호칭하고, 1472년(성종 3년)에 박종원을 삼봉도 경차관에 임명하고 삼봉도의 수토를 명하였다. 1693년(숙종 19년)에 자산도로 호칭하였으며, 이 시기에 일본과의 최초의 영유권 분쟁이 있었데, 조선 숙종대 안용복의 일본 피랍(1693년)으로 촉발된 조선과 일본 간의 영유권 분쟁은 일본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의 공문과 울릉도 도해금지령(1696년)이 내려짐으로써 독도 영유권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바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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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 독도 기술 현황
<표2>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 주제별 독도 기술
<표3> 2007년 영유권 공고화 사업 예산집행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