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체찰사제란 무엇인가?
- 최초 등록일
- 2014.06.06
- 최종 저작일
- 20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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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체찰사제의 형성
2. 체찰사제의 강화
3. 체찰사제의 정착
4. 체찰사제 운영실태와 비판
5. 체찰사제의 기능
본문내용
1) 체찰사의 부각
세종 중반 이후 현실적 국가 중대사들이 부각되기 시작, 이러한 중대사들을 추진하는 존재로서 재상급 봉명사신인 체찰사가 구체화 되었다. 제도로서의 체찰사제가 마련되는 단초는 세종 10년 황희가 도체찰사로 평안도에 파견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군국중사를 추진하는 주체로서 체찰사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2) 체찰사제의 사례
-황희로 하여금 북방의 야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의 국방체제 전반을 규정하여, 기본적인 토대와 관련된 국가 중대사를 다루게 하였다. (당시 황희는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신료로서의 최고의 지위에 있었다)
ㅡ> 이를 계기로 왕명을 봉행하는 존재로서 관찰사와 별도로 체찰사를 파견하는 제도가 형성되었음
(이를 계기로 보는 근거 - 왕명에 따른 시찰사로 수상의 인물이 판서급 부사를 대동하였고 이후 결과가 왕에게 보고되어 국가의 정책 방향이 그에 근거해 결정되었다.)
<중 략>
1) 체찰 활동의 전환
당시의 상황은 어린 성종이 13살에 즉위, 성종 즉위 초까지 세조대 이래의 훈신들이 국정의 중심에 있으면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있었다. 전환의 모습은 세종,세조대에 국방 문제에 체찰사의 활동이 중점적으로 맞춰 졌다면, 성종의 시기에는 백성에 대한 진휼 활동에 그 비중이 큰 것으로 알 수 있다.(그 활동이 매우 적극적이었음) 이는 세종,세조대에 무력으로 왜구, 야인들을 정벌하여 이들의 군사적 위협이 이전 보다 훨씬 줄어 들었기 때문.
-예종대의 체찰사(성종 이전)
경차관의 품질이 낮고 인망이 가벼운 까닭에 수령과 함께 도적문제를 해결 할 수 없어 예종 원년, 김국광과 이극배를 충청 경상 문폐사로 파견하였음.( 이는 경차관이 파견된 데 따른 한계가 나타났기 때문에 파견된 특이한 경우)
1.진휼사의 활동
발창권(도내의 창고를 여는 것)을 행사하고 직접 백성과 접촉하였고, 실질적 구휼 활동을 벌인 진휼관과 감고 등 담당자의 활동을 평가, 그 성과에 따라 서용하거나 논죄했음. 이러한 진휼체찰사의 활동은 성종 초에서 중반 이후까지 계속됨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