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구검의 일대기와 주변국 대외관계
- 최초 등록일
- 2014.06.11
- 최종 저작일
- 20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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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관구검의 인생을 중심으로 주변 정권의 정세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하였습니다.
목차
1. 서론
2. 생애
3. 공손씨(公孫氏) 정권과 고구려의 대외관계
4. 관구검의 고구려 정벌
5. 맺음말
본문내용
1. 서론
관구검의 생애를 중심으로 당시 중국에서 형성되었던 삼국의 상황과 더불어 요동에 할거하던 공손씨(公孫氏)정권의 관계를 알아보고, 한반도 국가의 외교관계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생애
관구검(?丘儉, ? ~ 255년)은 중국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으로, 자는 중공(仲恭)이다. 그는 河東郡 聞喜縣 출신으로 아버지인 관구흥(?丘興)의 고양향후(高陽鄕侯)의 작위를 물려받아 平原侯文學이 되었다. 위명제[曹叡]가 즉위 후, 동궁시절부터 절친했던 관구검을 우대하여 상서랑(尙書郞)에 임명하였다. 이 후, 우림감(羽林監)이 되었다가 낙양전농(洛陽典農)이 되지만 명제의 잦은 토목공사를 간했다가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전임되었다. 237년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전임되어 오환과 선비를 복속시키고 7월 요동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공손연은 이에 燕王이라 자처하고 군사를 일으키자, 이듬해 위명제는 사마의를 보내 238년 6월 공손연을 정벌하였다. 관구검은 이 때 공으로 안읍후(安邑侯)에 봉해진다. 242년 고구려가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자 관구검은 병사 1만 명으로 244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東川王이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와 비류수에서 싸워 패했으나, 양맥에서 고구려 군대를 크게 이겨 동천왕을 패주시켰다. 하지만 위군도 전력이 떨어졌으므로 철수한다. 245년 관구검은 재차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을 함락시킨다. 관구검은 동시에 현도태수(玄?太守) 왕기(王?)로 하여금 부여에서 군량을 받아 동천왕을 ?게 하였다. 위군은 동천왕을 매구(買溝)까지 추격하지만, 密友와 紐由의 분전으로 낙랑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 후, 관구검은 예주자사(豫州刺史)가 되어 오나라 북진에 대비한다. 252년 위나라 사마사(司馬師)는 오나라 황제 손권(孫權)이 죽고 손량(孫亮)이 즉위하자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나라 제갈각(諸葛恪)에게 동흥(東興)에서 크게 패하였다. 관구검은 양주도독(揚州都督) 제갈탄(諸葛誕)과 교대하여 제갈각의 북진을 합비 신성(新城)에서 막아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