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신분제도
- 최초 등록일
- 2014.06.20
- 최종 저작일
- 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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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양반층의 신분 변동 - 강혜미
1. 양반층의 증가와 분화
2. 양반서얼의 통청운동
3. 조선 후기의 무반
Ⅱ. 중간층과 서민층의 신분 변동 - 권새하
1.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
2. 서민층의 성장
Ⅲ. 노비층의 신분 변동과 민중운동 - 정유성
1. 노비층의 동향과 변화
2. 민중세력의 성장
본문내용
서론
조선 후기 사회는 신분의 상향이동이 심화되었고, 그에 따라 양반, 중인, 상민, 천인으로 구성된 신분구조에도 수치의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양반인구의 급증, 중인인구의 점진적 증가, 상민인구의 감소, 노비인구의 급감현상이 공통적으로 지적된 점에서 확인된다. 양반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면역인구(免役人口)도 증가하게 되었으며 양반은 수적 증가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분화가 일어났다. 또한, 서얼은 그 특성상 시대가 갈수록 수가 증가할 수밖에 없었고, 서얼통청운동이 일어났다. 문반뿐 아니라 무반계도 혼인이나 세습 등을 통해 그 나름대로 정체성을 확립해 가고 있었다. 중인층은 후기로 갈수록 사회 참여도나 의식이 높아져 상승과 분화가 일어났고, 서민층은 신분적 제약 속에서도 신분상승운동이 일어났다. 노비 층에서도 동향과 변화가 일어나 신분상승운동이 있었으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사족 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사회적 결속이 강해지면서 민중세력이 성장했다.
<중 략>
이 시기에 농업생산력의 발전, 병작제(竝作制)로의 이행, 상품화폐경제의 성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조응하여 재부를 축적하는 신흥 부민층이 형성되었다. 구래의 양반층(구향층舊鄕層)과 신흥 부민층(신향층新鄕層) 사이에서 향안입록(鄕案入錄)과 향권주도권의 향방을 둘러싸고 향전이 진행되었다. 신향층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되면서 구향층은 대응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종법 수용 이후 마을구조의 변화, 친족제도?경제구조의 변화로 신향층에 대한 양반층 상호 간의 공동 대응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양반층 내부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양반들끼리의 대결구도와 지방관의 향안 작성과정 개입 등은 신향층과의 대립구도에서 그들이 양반층이라고 해서 반드시 신분적?경제적 우위가 확보될 수 없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중반을 경과하면서 구래의 신분질서가 동요하고 새로운 계층이 성장하는가 하면 구세력과 신흥세력의 대립?갈등이 심화되면서 17세기 이래 확립된 사족지배구조는 점차 동요하기에 이르렀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5 조선 후기의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199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6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국사편찬위원회, 1997.
전형택, 『조선 양반사회와 노비』, 문현, 2011.
허흥식 외, 『조선시대의 과거와 벼슬(조선시대 양반사회와 문화1)』, 집문당,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