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1.1 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
2. 본론
2.1 당시 한·중·일의 관계도
2.2 전쟁의 전개와 이덕형의 외교 활동
3. 결론
3.1 이덕형이라는 인물의 의의
3.2 맺음말
4.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서론
1.1 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
이덕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한음'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문학에 통달하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일화들을 남겼다. 20세 때인 1580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선조 15년(1582년, 22세) 제술사의 신분으로 명나라 칙행 일행을 수행하였다. 이 때 왕경민은 '이덕형의 풍모와 기상이 여러 사람 가운데 빼어나고 도량과 재능이 온화하고 아름다워, 모름지기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글을 남겨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덕형은 과거 급제 후 바로 외교적인 실무를 맡음으로써 외교적인 소임을 담당할 수 있는 자질의 초안을 이미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그는 승진을 하여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으나 학문에 정진하고자 함을 이유로 들어 거절하고, 그 뒤로 7~8년을 학문 수양과 자기계발에 사용하였다. 이 시간은 이덕형이 실력 있는 외교관으로서 역사에 남은 것과는 별개로, 그를 뛰어난 문신·학자로도 역사에 남을 수 있게끔 해준 시간이었다. 그리고 선조 21년, 이덕형은 일본에서 사신들이 도착하자 이를 맞이할 문재로 발탁됨으로써 또 한 번 외교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
<중 략>
그러나 이 날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고 있었으며 5월 29일 이 성을 함락시켰다. 강화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명은 크게 당황하였고 강화파기의 뜻마저도 비추었다. 이는 일본에 대한 명의 불신을 한층 가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7개 조항이라고 내놓은 것도 명나라 황실에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고압적이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12월에 강화회담은 결렬되었다. 이로 인해 일시적인 소강상태로 있던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고,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이덕형은 재침을 예상하고 정유재란 발발 전 4년을 다음 전쟁을 위해 사용하였다. 훈련도감을 통한 군사훈련과 신병법의 적용, 대여진 정책이 그것이다. 훈련도감은 설치 초기와는 달리 1594년(선조 27년) 삼수병제의 편제로 개편되었다. 수도 방어의 핵심 군영 역할을 위해서였는데, 이 일은 유성룡과 이덕형이 담당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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