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본론
1) 역대왕조들이 관중에 도읍을 정한 이유
2) 관중에 도읍한 왕조들- 진(秦), 전한(前漢), 당(唐)
- 최초로 관중의 명칭을 사용한 진
- 관중을 차지한 전한과 당나라
3.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관중(關中)은 주(周)왕조부터 당(唐)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들이 터전을 잡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관중이라는 명칭은 동쪽으로 함곡관(函谷關), 서쪽으로 대산관(大散關), 남쪽으로 무관(武關), 북쪽으로 소관(蕭關)이 있어 4관(四關)의 중심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관중’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때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직후 관중지방에 수도를 확립하면서부터였다. 관중지방은 진을 포함해 총 12개의 중국 고대 왕조들의 근거지로 활약했다. 관중은 오늘날 섬서성(?西省)의 서안(西安)시(장안), 동천(?川)시, 함양(咸?)시, 위남(渭南)시, 바오지(??)시를 포함하는 지역을 일컫는다. 관중은 관중평원 내지 관중분지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황하 중류의 주요 지류인 경하, 위하, 북랑하가 합류되는 평원지대로, 진령산맥 이북과 만리장성 이남 지구를 일컫는다. 관중평원은 해발 300~600m에서 형성된 지형으로, 위수(渭水) 유역의 분지를 지칭한다. 관중평원 남쪽에는 평원상의 습지와 하안단구 사이에 황토대지가 펼쳐져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피할 수 있으며 농경에 유리하다는 지리적 이점을 갖추고 있었다.
<중 략>
어느 정도 성장하자 항우의 군대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유방의 군대가 항우의 군대에 밀려서 후퇴했다. 그러나 유방의 군대는 장기전으로 지친 항우의 군대를 사방으로 포위해서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는 전략을 펼쳤다. 결국 항우의 항복을 받아내고 유방은 한 왕조를 관중에 수립했다. 전한 대에는 관중의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육보거, 백거, 조거, 용수거, 성국거, 영지거, 위거 등과 같은 관개시설이 설치되었다. 한 무제 때에는 전국 각지를 관통하는 수륙 교통망이 체계화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관중조거(關中漕渠)’라는 수상 교통로가 건설되면서 관중에서 중국 곳곳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한나라 말기부터 발생한 전쟁과 내부 반란, 그리고 이후에 5호 16국의 분열 시대를 거치면서 관중지방의 인구는 급감하고 관중의 유리한 자연조건들은 파괴되었다. 당나라는 침체된 관중을 예전과 같은 상태로 복구시키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다. 균전제를 실시해서 농민들이 농업생산량을 늘릴 수 있도록 의욕을 고취시켰으며, 농업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수리사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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