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칠지도 연호의 해석
- 최초 등록일
- 2003.06.21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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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졸업 논문작품이며 A+을 받은 작품이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日本學界의 解釋과 檢討
Ⅲ. 韓國學界의 解釋과 妥當한 見解
Ⅳ. 맺음말
본문내용
칠지도 최초의 실사자 관정우(官政友) 1883년에서 1887년까지 석상신궁(石上神宮)의 궁사로 있었는데, 당시 보관중인 칠지도에 묻은 녹을 벗겨 금으로 상감된 명문을 발견하고, 이를 최초로 해독하였다.
의 논고는 모두 1907년에 간행된 그의 전집에 속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에 학계의 최초로 칠지도를 소개한 것은 성야항(星野恒)이라 할 수 있다. 延敏洙, 앞의 책, p.134.
성야항은 태초4년설(泰初四年說)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태(泰)자 밑에 좌변 ‘亻’을 남기고 …, ‘亻’은 ‘초(初)’에 가깝고 ‘시(始)’에 멀어, 아마도 ‘초(初)’자의 잔(殘 劃)이 되니, 한 무제의 태초(泰初)와 위 문제(魏文帝)의 태초(泰初)는 서로 멀리 떨어지기를 340년, 시대로부 터 생각하면 이 태초는 한대의 태초가 아니고 필히 위대(魏代)의 호(號)가 된다. 같은 책, p.134, 재인용.
이에 고교건자(高橋建自)는 서진태시설(西晉泰始說)을 주장하는데, 서진의 태시 4년은 268년이다. 그러나 당시 주론이 되고 있던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 조의 칠지도 헌상기사와의 관계를 규명할 수 없었던 까닭에 이 태시설보다는 태초설이 우세했다. 이것이 초기의 칠지도 연구에서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신공황후 52년 조의 기록에 보이는 백제에서 헌상하였다는 칠지도(七枝刀)와 같은 것으로 보기 위해 그 시기에 가까운 연호를 찾았다는 점이다.
1941년 말영아웅(末永雅雄)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면서 이와는 다른 견해를 나타낸다.
참고 자료
◎ 원전과 금석문
․七支刀 銘文.
․『日本書紀』 神功皇后 46~52년조.
◎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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