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초기 왕계의 구성
1. 고구려의 건국과 시조설화
2. 유리왕과 태조대왕의 즉위
Ⅲ. 왕실교체와 계루부 왕권의 확립
1. 주몽과 유리왕의 관계
2. 태조대왕 국조설의 문제점
3. 왕실교체와 계루부 왕권의 확립
Ⅳ. 맺음말
본문내용
삼국 중 고구려의 경우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중국측 사서에 고구려에 관한 언급이 간헐적으로 실려 있어, 『삼국사기』의 왕계에 대한 분석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있어왔다. 그러나 그간의 적지 않은 고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견해 차이가 크다. 한편에서 고구려 자체의 전승에 의거한 왕계의 왕으로서는 3세기 초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부터 실재하였음이 확인된다는 주장 이러한 견해는 주로 일본인 학자들(津田左右吉, 池內, 武田幸南등)에 의해 피력되었다. 이들은 중국 사서를 기준으로 삼아 이와 상충되는 부분이 많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하고 있다. 주요 요지는 중국사서가 후대에 쓰여진 삼국사기보다 인접시기에 편찬된 점, 자국 사서일 경우 과장 때로는 날조 등이 행해졌을 수 있는데 비해 제 3국인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객관성을 지닌다는 판단 등이다. 따라서 고구려 본기 초기기사는 대부분 후대에 조작된 것이나 비합리적인 것이라 신빙할 수 없으며, 3세기 이후가 되어야 믿을 수 있고, 고구려 자체의 전승에 입각한 왕으로 그 실재함이 확인되는 첫 왕은 제 10대 산상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견지되는가 하면, 다른 일각에서는 고구려의 실제 기년은 『삼국사기』의 그것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이른다는 주장 이러한 견해는 주로 북한 학자와 일부 남한 학자에 의해 전개되었다.
참고 자료
1. 1차 사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후한서』, 『삼국지』(『삼국지』위서 동이전)
2. 2차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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