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효종의북벌론
- 최초 등록일
- 2003.06.22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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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 인조반정의 상황
2. 호란의 과정
3. 호란 이후의 상황과 효종 즉위
4. 효종의 북벌 정책의 추진과 신료들의 반대
5. 좌절된 북벌
6. 북벌의 평가
7. 결론
목차
1. 인조반정의 상황
2. 호란의 과정
3. 호란 이후의 상황과 효종 즉위
4. 효종의 북벌 정책의 추진과 신료들의 반대
5. 좌절된 북벌
6. 북벌의 평가
7. 결론
본문내용
4. 효종의 북벌 정책의 추진과 신료들의 반대
효종은 즉위 후부터 배청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일단 김자점의 역모 사건으로 친청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이완, 유현연, 원두표 등의 무장을 중용하여 북벌을 위한 본격적인 군비 확충 작업에 착수했다. 1652년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군을 7000명에서 2만1000명으로 증강시키고 그중 1000명을 유사시에 대비하도록 서울에 주둔시키는 등 대폭 개편 강화하고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어영군은 별초병과 기병을 위주로 한 정예부대였고 6도에 분산 배치하였다. 그리고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190명에서 천명으로 증원시키고 기병화하였다.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 강화하여 한성 외곽의 방비를 보강하였다. 그리고 각지의 성곽을 수축하였으며 1654년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의 편제를 정비하여 훈련을 강화시키고 부대 기본 단위인 각 초의 조직과 기능을 철저하게 정비하고 영장제도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10만명의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노비 색출 사업을 하여 도망친 노비들을 색출하여 이들을 군인으로 전환시키는 작업도 진행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