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통일
- 최초 등록일
- 2014.09.05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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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수의 통일과 역사적 성격
1) 수의 통일과 집권화 추진
2) 수 양제의 통치와 국제관계
2. 당의 건국과 발전
1) 당조의 창업
2) 현무문의 변과 태종의 시대
3) 무주혁명과 현종의 치세
본문내용
1.수의 통일과 역사적 성격
1)수의 통일과 집권화 추진
북주 무제가 담당하지 못했던 중국의 통일은 북주의 외척 출신으로 수왕조를 건립했던 양건(541~604)에 의해 달성되었다. 양씨는 홍농(弘農) 화음(華陰, 섬서성 화음) 출신으로 서위의 우문태와 마찬가지로 무천진 무장 출신이었다. 12대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양충이 부친이었다. 양충이 수국공(隨國公)이 되면서 양견이 그 작위를 세습했는데, 수(隨)를 수(隋)로 고쳐 왕조의 명칭으로 삼았다.
양견의 장녀는 북주 무제의 황태자비가 되었고, 황태자가 즉위해 선제가 되자 황비가 되었다. 선제의 뒤를 이어 7세인 정제가 즉위하자 야견은 승상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이어 상국·수왕이 되어 581년에 제위를 선양받았다. 이가 바로 수 문제이다. 이 과정은 중국 역사상 가장 손쉬운 역성형명이었다고 평가된다.
<중 략>
무후를 천후(天后)라 부르게 했으며, 바로 이 무렵부터 고종은 병이 들어 정무는 무후가 독단적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683년 고종이 죽고 무후가 낳은 중종(中宗)이 뒤를 이었지만 무후의 노여움을 사 제위에 올라 있던 날은 불과 54일에 불과했고 동생 예종(睿宗)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 정치는 여전히 무후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684년 이경업(李敬業)의 반란을 계기로 이른바 밀고의 문을 열어 밀고를 장려하였는데, 밀고자 중 관리로 발탁된 자가 색원례(索元禮)와 내준신(來俊臣) 등의 혹리(酷吏)였다. 그들이 행한 공포정치에 의해 당의 황족 및 그들과 관련 있는 귀족세력은 대타격을 입었다. 690년이 되자 왕망 때와 마찬가지로 국호를 주(周)로 바꾸자는 수만 명의 청원이 있었고, 또 봉황과 적작(赤雀) 등의 상서로운 조짐들이 보고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여론공작이었다. 이에 따라 무후는 마침내 당을 주로 고치고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를 칭했는데, 당시 나이 60세를 넘긴 때였다. 이 사건을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고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