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궁예의 역량 및 공과
Ⅲ. 왕건의 궁예 계승의식
Ⅳ. 마치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궁예정권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궁예에 대한 관계 사료를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훌륭한 왕 왕건을 강조하기 위하여 궁예를 악의 화신, 정신이상자, 또는 사악한 패륜적 폭군으로 규정하여 폄하하는 입장을 가진 경우이다. 이 경우는 궁예를 오직 탐학한 비정상적인 인물로만 간주하면서 그의 정치적 과정과 그럼으로써 이루어진 역사적 업적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이에 반하여 궁예와 그의 정권을 도덕적인 평가가 중심이 아닌, 궁예는 과연 어떠한 역사적 존재였으며 그가 결집한 세력의 성격은 어떠했는가와 같은 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궁예의 집단을 군도적 성격의 무리로 보기도 하였고, 이와는 달리 궁예가 초기에 세달사에 출가한 사실을 근거로 그를 사원세력으로 규정짓기도 하였다.
허나 이와 같은 궁예에 대하여 왜곡된 해석을 재조명하려는 연구는 이미 충분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궁예 정권의 역사적 업적을 왕건중심적인 시각과 반대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궁예정권을 바라보려고 한다.
이에 더하여 왕건이 정책면에서는 반 궁예를 부르짖으며 쿠데타를 일으켰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궁예의 계승자였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료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첫 번째로 살펴보고자 했던 과제는 궁예정권의 공과에 대한 정확한 평가이다.
지금까지는 궁예의 과오만을 지나치게 부각됨에 따라 궁예를 부정적 인물로 평가하는 견해가 많았다. 허나 그는 공적 또한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이를 먼저 규명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왕건이 궁예의 계승자였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료 검증이다.
이와 관련한 연구로는 이재범 선생님과 백남혁 선생님의 논문이다. 하지만 그 논문들에서 언급한 바들을 완벽히 수용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느껴졌는데 이것을 바로 필자가 해야 할 역할로 삼고 이에 대한 동향을 살펴 볼 것이다.
참고 자료
신호철,1982,「궁예의 (弓裔) 정치적 성격 - 특히 불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한국학보』 Vol.8,일지사(한국학보)
최규성,1987,「궁예정권의 성격과 국호의 변경」『상명여자사범대학』 Vol.19, 상명대학교 논문집
조인성,1989,「궁예의 출생과 성장」,『동아연구』 Vol.17,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조인성,1993,「궁예의 (弓裔) 세력형성과 건국」,『진단학보』 Vol.75,진단학회
양경숙,1993,「궁예와 그의 미륵불 사상」,『북악사론』 Vol.3,북악사학회
정선용,1997,「궁예 (弓裔) 세력형성 과정과 도읍 선정」,『한국사연구』 Vol.97,한국사연구회
백남혁,2000,「궁예의 전제왕권 확립과 왕건의 후삼국통일 기반의 재조명」,『동서사학』 Vol.6,7,한국동서사학회
이재범,2005,「궁예,왕건정권의 역사적 연속성에 관한 고찰」,『사림(성대사림)』 Vol.24,수선사학회
이영수,2006,「"궁예 설화"의 전승 양상에 관한 연구」,『한국민속학』 Vol.43,한국민속학회(구 민속학회)
신호철,2006,「궁예의 대외정책과 대외인식 」,『역사와 담론』,호서사학회
이재범,2006,「역사와 설화 사이 - 철원 지역설화로 본 궁예왕,『강원민속학』Vol.20,강원도민속학회
김두진,2007,「궁예(弓裔)의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사상과 그 의미」,『한국학논총』 Vol.29,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조인성2007,『태봉의 궁예정권』,푸른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