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과 요동정벌의 꿈
- 최초 등록일
- 2014.09.25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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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최영에 대하여
2. 고려 말 우왕 14년(1388녀)의 시대로
3.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인물
4. 요동정벌과 최영에 대한 평가
5. 이 글을 마치며
본문내용
1. 최영에 대하여
최영은 원명교체기 고려 말의 신흥무인세력이다. 그는 공민왕시절부터 홍건적과 왜구를 여러 차례 맞아 싸우며 격퇴시키면서 이성계와 더불어 고려의 명장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최영을 왜구는 최영을 백발의 최만호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왜구들에게 무서운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우왕14년(1388년) 명의 철령위 요구로 요동정벌을 감행하게 되었는데, 팔도 도통사가 되어 고려의 5만 정벌군을 좌군도통사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에게 맡기고 자신은 우왕과 함께 후방에서 지휘를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운 끊임없는 반대가 있었으나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정벌의 꿈은 무너져 버렸고, 우왕의 폐위와 최영의 유배로 고려의 마지막 생명의 끈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 후 최영은 고봉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참형되었다. 이로 인하여 고려는 불과 4년 만에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고려 말 우왕 14년(1388녀)의 시대로
우왕 14년(1388년) 고려는 극심한 왜구의 노략질로 국토의 해안가는 피폐해져 있고, 공민왕의 개혁 실패로 인하여 조정은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세족의 횡포로 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고려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왜구는 충정왕 때부터 대규모로 확대되어 고려의 해안가를 약탈하였는데, 우왕치세에 들어서서 왜구의 노략질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때 왜구를 격퇴하며 성정한 신흥무인세력 중 큰 인물이 두 명 있었는데, 한명은 공민왕 5년(1356년) 공민왕이 파견한 유인우를 도와 쌍성총관부 수복을 도운 이자춘의 아들이었던 이성계이며, 또 다른 한명은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나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았으며, 문관의 집안이었으나 무관직으로 진출하여 여러 무공을 세운 최영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