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역사
- 최초 등록일
- 2014.10.05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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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항 후
2. 식민지
⑴ 하층민의 집
⑵ 새로운 양식의 집
3. 광복 후
⑴ 해방촌
⑵ 도시 저소득층
⑶ 아파트의 등장
⑷ 새마을 운동
4. 현대
본문내용
1. 개항 후
주거의 경우 서구건축의 영향은 거의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민중들의 주생활이 획기적으로 변화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건축양식을 시도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생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서구문물에 자극을 받은 일부계층에서는 그들의 건축을 그대로 수용하여 양식주택을 만들거나 기존의 전통주택을 서양식으로 개조하는 사례를 보여주게 된다.
예를 들어 1882년에 개조된 민겸호의 집은 카펫과 커튼, 서양가구 등으로 실내를 꾸몄으며, 문턱을 낮추고 들창은 열창으로 고쳤으며, 앞마당에는 정원과 정구장을 만들고, 행랑채에는 사무실과 서재를 양식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한편 1910년대에 지어진 이준 주택이나 윤덕용 별장은 외국 건축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는데, 이준 주택은 석재를 혼용한 벽돌 2층의 프랑스 르네상스식 건물로서 일본인에 의해 설계와 시공이 이루어지고, 재료 일체도 일본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일부 귀족, 부호계층의 사대주의적 취향이었을 뿐 전반적인 주거문화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중들은 가사제한의 범주로서 자유롭기는 하였으나 전래되어 오는 건축방법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거 상류계층의 고급 건축요소들이 민중에까지 전파되면서 기단에 다듬은 돌을 사용한다든지, 굴도리를 사용한다든지, 화반이나 소로, 익공을 설치한다든지, 부연을 덧달아 처마를 길게 내미는 기와지붕을 사용하는 등 보다 권위적, 장식적 요소들이 확산되었다.
1980년대에 건립된 안국동 공덕귀가나 1900년대에 세워진 성북동 이재준가는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살라 할 수 있다. 건축양식과 방법은 거의 대부분 조선후기의 것을 고수하고 있다. 다만 건축주의 사회적 계층에 관계없이 궁궐건축 못지 않은 고급 건축요소가 거침없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개항기의 사회상황을 반영한다.
새롭게 도입된 건축재료, 즉 벽돌, 우리, 시멘트, 철 등도 대량으로 공급되었지만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구조나 평명을 바꾸지는 않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