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결혼의 역사(원시~고려), 혼인의 기원, 혼인의 유래, 삼국시시대의 결혼 문화
- 최초 등록일
- 2014.10.08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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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혼인의 기원
2. 혼인의 유래
3. 원시시대
4. 삼국시대
1) 뼈대 없는 집안과는 안돼?
2) 사회적 제약
3) 혼례과정
4) 혼인 방법
5) 남편이 둘, 아내가 셋
5. 고려시대
1) 시집살이 않는 여성, 처가살이 하는 남성
2) 아내 재산 따로, 남편 재산 따로
3) 이혼과 재혼
4) 여성도 호주가 되었던 사회
6. 장가와 시집의 뜻
본문내용
이런 군혼형태에서 발전한 첫단계는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금지하던 혈연가족으로 발전했고 이어 형제 자매간의 관계를 금지시켜 푸날루아가족 형태로 발전 시켰다.
푸날루아 가족 형태는 대우혼 단계를 거쳐서 근친과 원친, 인척까지 혼인의 대상에서 제외 시켜 나갔고 점차 혼인대상의 범위는 축소되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군혼형태는 지속되기 힘든 상태가 되었고, 또 생활에 있어서도 생산력의 발전으로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시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재산 상속을 위해 순수한 혈통의 자기 자녀를 바라게 되었는데 군혼형태에서는 이를 가름하기가 불가능했기에 이때부터 일부일처제의 혼인 형태가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중 략>
삼국시대 상류사회에서는 신분이나 지위가 맞먹는 집안끼리의 중매결혼을 선호했고, 이를 무시한 남녀간의 결합은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다.
만명의 부모인 숙흘종 부부는 만명이 만노군(萬弩郡 : 지금의 충북 진천군) 태수로 부임해가는 김서현을 따라가려 하자, 중매도 없이 야합한 것에 크게 분노하여 딸을 다른 집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한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낳은 하백의 딸, 유화(柳花)는 중매도 없이 천제(天帝)의 아들을 자칭하는 해모수를 만나 정을 나누는데, 이를 안 하백은 집안을 망신시켰다 하여 딸을 유배에 처한다.
<중 략>
고려가 일부일처의 사회였는가 아니면 일부다처의 사회였는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였다가 고려말이 되면 일부다처제였던 몽고의 영향으로 일부 관인층 사이에서 일부다처의 경향이 나타났다.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시기의 해프닝으로 ‘박유사건’이 주목된다. 원 간섭기에 박유라는 재상은 평소에 늘 주위 사람들에게 주장하기를 ‘고려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므로 여자의 머리가 희어지도록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고려가 당시까지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일부다처의 경향이 유행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