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이후 집의역사
- 최초 등록일
- 2014.10.08
- 최종 저작일
- 2014.10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1. 개항 기
1) 새로운 양식의 도입(세창양행)
2. 식민지 시대
1) 화전민, 토막민
2) 문화주택
3) 영단주택
3. 광복 후
1) 해방촌
2) 벌집촌
3) 청계천 판자촌
4. 박정희 정권
1) 새마을 운동
5. 현대
1) 타워팰리스
2) 구룡마을
본문내용
1. 개항기
♦새로운 양식의 도입(세창양행)
한국 최초의 양식주택은 고종(高宗) 21년(1884)경에 인천에 건립된 세창양행(Heinrich Conatantion Edward Meyer Co.)의 사택으로서 건평 173.15평 일부 2층의 벽돌집으로 외벽에는 회칠을 하고 붉은 기와를 얹은 별장류의 주택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일본인들이 청광각(淸光閣)으로 호칭, 인천도서관으로 사용되다 6 · 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주택에는 사무실, 응접실, 침실, 부엌, 식당, 오락실을 갖춘 전통한국주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와같은 양식건축이 도입되면서 일반국민간에 새로운 문제로 대두된 것은 스팀난방에 대한 몰이해가 빚은 것이었다.
2. 식민지시대
♦화전민, 토막민
화전민이란 산속에 들어가서 일정한 장소에 불을 지르고 그 자리에 강냉이나 감자 등을 심어서 먹고살다가, 땅의 거름기가 다해서 농사가 안 되면 다른 곳으로 다시 옮겨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럼 이러한 화전민은 왜 식민지 강점 후 증가되었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들 수가 있다.
①평지에서 파산한 사람도 화전으로 경작지를 쉽사리, 무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점, ②하층의 조선 사람들은 행정관청의 지도 감독이 쉽게 미치지 않는 곳에서 생활하기를 좋아한다는 점,
③초근목피로 사는 사람들은 삼림법위반으로 형을 살아도 감옥생활이 제집에서의 생활보다 나아서 고통이 되지 않는다는 점 등이 그 원인이다. 다시 말하면 파산한 농민과, 일본의 지배법규가 미치지 않는 곳에 살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현 생활보다 감옥생활이 오히려 나은 처지에 있는 빈민들이 바로 화전민이 된 것이다.
토막민은 화전민과 농촌빈민과는 달리 일제 강점이후 새로 생겨난 빈민층으로 일제강점기의 소산물로 볼 수가 있다. 즉, 일제 강점기에 새로 생겨난 빈민층으로 그 이유는 이러하다. ‘토지조사사업’과 일본 농민의 조선 이민 등으로 농토를 잃고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노동시장으로 흘러들어가거나 중국인의 소작인이 되어 만주지방으로 가거나 화전민이 되고 혹은 도시지역으로 흘러들어가서 도시빈민인 토막민이 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