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서정주의 대한 조사
- 최초 등록일
- 2014.10.11
- 최종 저작일
- 20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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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서
2. 교재의 시 및 해설
3. 시인과 맏이 사이에서의 갈등
4. 시인의 유명세를 떨처라
5. 마무리-서정주 더 알고 싶다 (서정주의친일행동 과 생명파)
본문내용
1.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서
미당은 1915년 5월 18일(음력)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마을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서당과 초등학교를 마친 뒤 서울 중앙고보에 들어갔으나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듣고 시위를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빈민촌에 들어가 넝마주이 노릇을 하는 등 떠돌다가 석천 박한영 스님을 만나면서 지금의 안암동 개운사 뒤편 대원암에서 <능엄경> 등 불교경전을 배웠다. 스님은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에 입학시켰고, 불교적 세계관에 바탕한 윤회설에의 경도, 절대 영원에로의 회귀 욕망 등으로 말해지는 미당 시의 전반적인 기조는 바로 여기서 싹을 틔우게 된다. 미당은 1935년 ‘시건설’이란 잡지에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로 널리 알려진 시 ‘자화상’을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시적 여정의 본격적인 시작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부터다. 그 해말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내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평생 1천여 편의 시를 남긴 미당의 시세계를 한마디에 가두기에는, 미당이 보여준 상상세계의 오지랖은 크고도 넓다. 미당의 시는 억눌린 정신의 아픔을 노래하는 관능적인 초기시서부터 신화 정신과 불교적 달관에 이르는 후기시까지 다양한 편력을 보여준다.
30대까지만 해도 매력에 지나지 않았던 불교는 40대를 지나면서 미당의 작품 깊숙히 천착하며 문학적 절정기를 일군다. 그러나 일제말 친일잡지인 ‘국민문학’ 편집일을 보면서 친일시나 종군기를 썼던 일은 설사 당시로서는 대세였다 할지라도 씻을 수 없는 흠집을 남겼다. 80년대 군부정권에 대한 찬양 발언 등도 그를 아끼는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우리문학계의 큰 샛별이었던 미당은 2000년 12월 24일 폐렴 악화로 이날 새벽부터 혼수상태에 빠진 미당은 고령으로 인한 노환까지 겹쳐 끝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28일 고향 선영에 묻혔다. 향년 85세.
참고 자료
박호영, 현대시속의 문화풍경, 한국문화사, 2004 p145~147
김전홍, 한국현대시인비판, 시와문학사, 1995, p196~171
조연현 외, 미당 연구, (주) 민음사, 1994년, P10
성낙양 외, 두산백과사전, 두산동아, 2000년 p243~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