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가와 진나라
- 최초 등록일
- 2014.11.08
- 최종 저작일
- 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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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의 등장
2. 본론
2-1. 법가사상
2-2. 진나라와 법가
2-3. 상앙
2-3-1. 상앙의 배경과 사상
2-3-2. 상앙의 변법
3. 결론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기원전 771년 주(周)나라의 수도 호경이 서쪽의 이민족인 견융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왕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자가 동쪽으로 피신하여 왕위에 오르니 이때부터를 역사상 동주라고 부르게 된다. 왕실의 힘이 약해진 동주시대는 두 개의 시대로 구분되어 인식되어 오고 있는데, 기원전 77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를 춘추시대라고 부르며 기원전 403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연대구분과 명칭은 춘추와 전국책이라는 두 역사서에서 비롯되었다. 각국 간에 존재했던 무인지대가 사라지고 국가 간의 군사적인 충돌이 수시로 일어났으며 외교 문제가 내정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주 왕실은 제후에 대한 영향력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 교육이 널리 보급되어 평민 출신의 학자들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알리기도 하였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각종 정치철학이 등장하여 이후 2000년 중국 역사에서 볼 수 없는 사상의 절정을 이루었다. 제자백가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십가도 되지 않았다. 유가와 도가, 법가, 묵가, 병가 등이 그 때에 등장한 사상들이다.
이 가운데 법가는 통일을 향해 가는 방법으로써 전제군주를 지지하고 상벌을 중시하는 것을 택하였다. 법가의 법 개념은 전통이나 관습, 종래의 특권, 인습적인 도덕관, 친족의 연고관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개인적인 측은지심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법률은 군주의 의지를 반영하는 까닭에 반드시 성문법으로 명기되어야 하며, 보편적이면서도 엄격하고 공평하게 시행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에서의 법률은 군법이나 계엄법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목적이 올바르다면 수단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한 정국 가운데서 다양한 제자백가가 나타났고, 특별히 그 가운데 진(秦)나라는 법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후에 전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바로 이 진나라였다. 따라서 이 후에는 법가사상과 함께 진나라에 법가사상이 받아들여지고 적용된 한 예인 상앙의 변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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