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흐름을 바꾼 격변 인조반정
- 최초 등록일
- 2014.11.28
- 최종 저작일
- 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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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인조반정의 경과 - 연표중심
2. 인조반정 후의 정치적 변화
2-1 대북정권에서 서인정권으로
2-2 주요반정공신
3. 인조반정의 평가
3-1 부정적 평가
3-2 반정의 의미를 인정하는 평가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인조반정은 1623년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중심으로 하여 일군의 인물들이 무력을 사용하여 국왕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인조반정 후에 북인정권에서 서인정권으로 바뀌면서 조선사회에 명분론을 중시하는 성리학 이념이 완전히 굳혀지게 되는데 이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인조반정을 조선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기준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중 략>
김류는 반정 당시 반정군의 총대장을 맡은 인물이다. 반정 성공 후 일등공신으로 녹훈을 받고 병조판서, 좌의정, 영의정까지 역임하는 등 인조 대 전반기 정국을 주도한다. 김류는 폐모론에 대한 통분으로 이귀와 함께 반정을 도모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정 후 그가 추천하고 등용한 자들 대다수가 폐모론을 주창했거나 폐위정청에 참여한 자들인 것으로 보아 반정의 진짜 동기는 따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류는 홍서봉, 장유, 김상헌 등과 함께 광해군 대 삼청동결의사건이라고 하여 인목대비가 있는 경운궁으로 몇몇 대신들이 거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그리 알라는 내용의 익명 밀서를 보낸 자로 지목받았다. 그러나 허균으로 밝혀지면서 무사할 수 있었는데 이때의 불안한 자신의 처지와 불만이 그의 진짜 동기였을 것이다.
<중 략>
인조와 반정세력의 명분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반정의 대표적 명분인 ‘모후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것’은 왕위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반정의 명분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광해군의 외교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맹목적인 사대의식에서 벗어나 격동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굳이 이런 명분을 따지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모시던 국왕을 내쫓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사실은 어떤 논리를 동원하더라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는 근원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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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sillok.history.go.kr)
kbs 역사스페셜 ‘그 날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다-인조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