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생애와 그 당시의 사회
- 최초 등록일
- 2014.12.12
- 최종 저작일
- 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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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스스로 '바보'이기를 자청했던 전태일의 생애와 그의 업적, 그리고 그 당시의 사회에 대하여 쓴 리포트입니다.
목차
1.전태일은 누구인가?
2.전태일이 노동운동을 하게 된 원인과 배경 및 가족사
3.‘바보회’ 창단의 계기와 유래. 왜 ‘바보회’인 것인가?
4.그 시대에는 왜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는가?
5.전태일은 왜 분신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나?
6.전태일의 분신자살이 어떤 효과를 낳았고, 사회에 어떤 파장을 주었는가?
7.분신자살은 과연 옳은 판단과 선택이었나? 더 좋은 방법은 없었는가?(개인적인 의견)
본문내용
[전태일은 누구인가?]
전 태일은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19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주하여 남대문국민학교를 다녔다. 1963년 대구에서 살다가 다시 1964년 상경하여 1965년부터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하였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건축 노동자로 일하다가,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노동조건 실태 설문 조사를 하고, 정부, 언론 등에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후 다락방 철폐, 노동조합 결성 지원, 노동조건 개선 시위 기획 등을 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유명무실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분신 항거하였고, 그 날 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살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어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어머니 이 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청계노조와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정부의 산업화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1970년대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전태일이 노동운동을 하게 된 원인과 배경 및 가족사]
전 태일이 일하던 청계천의 평화시장은 좁은 공간에 다락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밀집시켜 일을 시키다보니 노동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햇빛도 비추지 않는 좁은 다락방에서 어두운 형광등 불빛에 의존해 하루 14시간씩 일을 했다. 환기 장치가 없어서 폐 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는데, 특히 ‘시다’라고 불린 보조원들은 13~17세의 어린 소녀들로 초과근무수당도 받지 못한 채 극심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전태일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참고 자료
[교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중핵교과 읽기 교재 개정3판 <인간의 가치 탐색>
[네이버 지식백과] 전태일 [全泰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전태일 [全泰壹]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인]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61676673&qb=7KCE7YOc7J28IOu2hOyLoOyekOyCtA==&enc=utf8§ion=kin&rank=4&search_sort=0&spq=0
[네이트 지식인]
http://ask.nate.com/qna/view.html?n=6149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