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최현배의 인생은 노년에 이르기 전까지는 평탄치 못했다. 그럼에도 최현배는 국어 연구를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가 남긴 여러 저서들과 후계자는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문은 다사다난했던 최현배 선생의 일생 중,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그리고 한글 간소화 파동을 중심으로 일대기를 기술하였다.
목차
1. 들어가며
1.1 생애 및 경력
1.2 본문 요약
2. 흥업구락부 사건
3. 조선어학회 사건
4. 한글 간소화 파동
5. 나오며
본문내용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해방 후에는 한글 사용의 환경이 열악하였다. 게다가 조선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도 부족했는데, 조선어학회는 해방 이후 다시 한글의 위치를 되돌리기 위하여 모이게 되었다. 박용규, 위에 책 307쪽
그 후 최현배는 편수국장을 두 번이나 취임하면서 한글 전용, 한글맞춤법, 교원 양성, 교과서 편찬, 사전 편찬 등에 힘썼다.
한글 간소화 파동은 최현배가 두 번째 편수국장 때 일어난 한글의 수난이다. 해방 후 편수국장으로 일하다가, 다시 한국 전쟁에 의해 흔들렸던 사회를 일으키는 것이 편수국장 재임의 동기라고 한다. 한글 간소화 파동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으로 백두진 국무총리가 국무총리령 훈령 제 8호로 엣 맞춤법 사용의 한글 간소화 령을 내린 것이다.
이승만이 한글 간소화 령을 내린 이유는 개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오랜 시간의 미국 유학 생활로, 해방 이후 신문과 잡지에서 ‘통일안’에 입각한 표기법을 읽었을 때 매우 불편했다. 정재환, 『한글의 시대를 열다』, 경인문화사, 2013, 361
이에 따라 국문을 중시한다는 입장에서 한글 간소화를 주장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바침은 끗소리에서 발음되는 것에 한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종래 사용하던 바침 가운데 ‘ㄱㄴㄹㅁㅂㅅㅇ ᆰᆰᆰ ᆱ ᆲ’ 등 10개만을 허용한다. 다만, 바침으로 사용된 때의 ‘ㅅ’의 음가는 ‘ㄷ’의 음가를 가지는 것으로 하고, ‘ㄷ’은 바침으로 아니 쓴다.
2. 명사나 어간이 다른 말과 어울려서 딴 독립된 말이 되거나 뜻이 변할 때에 그 원사 또는 어원을 발키어 적지 아니한다.
3. 종래 인정되어 쓰이던 표준말 가운데 이미 쓰이지 안커나 또는 말이 바뀌어진 것은 그 변천된 대로 적는다.
간소화안에 적극 반대했던 최현배 편수국장과 당시 김법린 문교장관은 사면을 당했다. 최현배는 간소화안의 부당성 주장을 주장했고, 각 학자들 간에는 맞춤법에 대한 논란이 잇따랐다.
참고 자료
강복수,『국어문법사연구』, 형설출판사, 1972
최현배,『한글만 쓰기의 주장』, 정음사, 2000
최현배,『옥중에서 읊음』, 한글 100, 1947
최경봉,『우리말의 탄생』, 책과 함께, 2005
박용규,『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한글학회, 2012
정재환,『한글의 시대를 열다』, 경인문화사, 2013
이석린,『조선어학회 사건과 최현배 박사』, 나라사랑 제1집, 외솔회, 1971
허만길,『외솔 최현배 박사와의 만남』, 나라사랑 제108집, 외솔회, 2004
김정환,『최현배의 교육사상 연구』, 교육철학회,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