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 정치활동과 유물유적 A+ 리포트
- 최초 등록일
- 2015.02.16
- 최종 저작일
- 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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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충선왕의 정치와 그와 솬련된 유물유적에 대해 쓴 리포트입니다.
목차
1. 충선왕은?
2. 충선왕의 정치활동
3. 후대의 평가
4. 인물 및 유물유적
본문내용
1) 충선왕 忠宣王, 1275~1325
충선왕은 25대 충렬왕(忠烈王, 1236~1308)과 원나라(몽골제국) 5대 세조 쿠빌라이(khubilai khan, 1215~1294)의 딸인 쿠툴룩켈리쉬(제국대장공주)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장(璋), 몽골명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익지예보화)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자, 반식민지였다. 고려에서도 아버지 충렬왕보다는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의 권력이 더 막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장은 1277년, 3살의 나이에 세자로 봉해졌다. 충렬왕 원년 을해 9월 정유일에 출생했고 3월 정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두 차례나 왕위에 오르는 흔치 않은 경험을 치러야 했다(첫 재위:1298년 1월-8월, 복위:1308년 7월 – 1313년 5월). 그럼에도 그 두 번 모두를 합쳐도 재위기간이 채 6년이 안될 만큼 짧다. 그만큼 그의 국왕으로서의 삶은 험난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그의 재위가 고려말 원간섭기 역사에서 간과할 수 있는 시기는 결코 아니다.
왕위는 짧았지만 51세를 사는 삶 그 존재 자체가 고려의 내정 혹은 여원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과 크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강력한 고려 재건 및 자주정책을 추진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원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도 하고 수용을 넘어 원의 간섭 자체를 더 강화시키는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반원(反元) 정책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많은 정책을 추구하다가 원에 의해 강제 폐위를 당하였으면서도 국왕의 신분임에도 고려왕실을 떠나 원나라에 머물면서 전지(傳旨) 정치를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에서 인생 후반의 모두를 보내다가 임종도 원나라에서 맞이하기도 하였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의 사관들은 충선왕을 두 가지 상반된 시각에서 평가했다.
참고 자료
원 간섭기 고려 국왕 충선왕의 정치적 딜레마, 안외순
원(元) 간섭기 고려 충선왕의 정체성에 대한 일연구, 안외순
고려 충선왕대 정치개혁과 정치세력, 변은숙
고려 충선왕대 정치운영과 정치세력 동향, 박재우
충선왕의 개혁과 사림원의 설치, 이기남
신편 고려사 世家3, 정인지 외
국역 고려사 列傳 1권, 동아대학교
국역 고려사 列傳 4권, 동아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