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종묘, 독립문 근교답사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5.02.16
- 최종 저작일
-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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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종묘, 경복궁, 독립문을 답사하고 적은 근교답사 보고서 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종묘
서울 안, 혹은 서울 바로 외곽까지 그 안에 스민 조선(朝鮮)시대를 알아보기 위해 문화유적 답사에 나섰다.
먼저 처음으로 선정한 곳은 종묘이다. 종묘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어서 그 가치가 위대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가본 적도 없을뿐더러 정확히 어떤 곳인지도 잘 몰랐다. 따라서 이번 근교답사 주제에 맞게 가장 먼저 생각한 곳이 종묘이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길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의 신주를 모셔둔 곳이며, 모든 조선의 왕이 가장 중요시 생각했던 성리학적 제례공간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보아 그 어느 문화재보다 가장 조선을 잘 보여줄 것이라 생각했기에 특히나 더 신경 쓴 곳이기도 하다. 종묘에 가기 전 사전조사를 먼저 하였다. 다음은 종묘에 대한 설명이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하고 나서 바로 짓기 시작하여 1395년에 경복궁보다 먼저 완공했다.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고대 중국의 도성 계획 원칙을 따라 경복궁의 왼쪽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왕조가 이어져 봉안해야 할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 건물의 규모가 커져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후에 그 신주를 종묘로 옮겨 모신다. 정전에는 공덕이 뛰어난 임금들을 모셨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년전의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종묘제례는 국가의 가장 큰 제사로서 정전에서 1년에 2번 열렸으며, 왕이 친히 주관했다. 종묘제례에는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참여하였으며, 음악 〮 노래 〮 춤이 일체화한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진행했다. 현재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행하고 있다. 제사 외에도 종묘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일을 알리거나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배제하여 단순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순함 속에서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를, 엄숙함 속에서 왕조의 신성한 권위를 읽을 수 있다.
참고 자료
http://www.google.co.kr/url?sa=t&rct=j&q=&esrc=s&frm=1&source=web&cd=6&ved=0CEQQFjAF&url=http%3A%2F%2Fwww.cha.go.kr%2Fkorea%2Fheritage%2Fsearch%2FCulresult_Db_View.jsp%3FVdkVgwKey%3D11%2C02270000%2C11&ei=uoqEUsi_NIaTiQfmoIFI&usg=AFQjCNH0tPeUqYrawgiYxl67UgR9yggP_Q&bvm=bv.56343320,d.aGc&cad=rjt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821000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