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의 역사와 변천 과정
- 최초 등록일
- 2015.03.11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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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량리의 역사와 변천과정을 건축적으로 이해하고 기술한 목적이 있으며,
역사박물관에서 제공하는 청량리에 대한 내용을 사진과 글을 통해 이해하기 쉽고
응용 가능하게 작성한 글이다.
목차
청량리
동교지역과 청량이 일대의 도시 변화
청량리 지구 좃ㅇ과 도시 한옥 주거지의 형성 배경, 부흥주택
청량리의 도시 한옥과 그 특징
청량리 일대의 시장 형성과 도시 한옥의 반응
청량리 일대 시장의 사회경제지리
청량리 시장과 도시 한옥과의 관계
본문내용
청량리의 지명은 청량사라는 사찰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하는데,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 청량리계에 속하는 성외지역이었다. 이후 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5부가 5서로 바뀔 때 동서 인창방동소문외계의 한 동인 청량리로 되었다. 일제감점기인 1911년에는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기도 경성부 인창면 청량리로 불리다가,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가 되었다. 1936년에는 경성부에 다시 편입되면서 청량리 정으로 되었고, 1943년 일제 식 동명을 우리의 동명으로 고쳐 부를 때 청량리동으로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이력을 가진 청량리와 이 주변 지역은 예로부터 도성 안 사람들이 도성 밖을 나갈 때 잠시 머물거나 거쳐가는 장소였다. 흥인문 밖 넓고 평탄한 지형에 동관왕묘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마교로 갈아 타고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왕릉으로 행행을 했다. 또한 광나루를 건너 광주-여주를 거쳐 동남방으로 내려가거나 춘천을 거쳐 동북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 지역을 지나갔다. 조도는 길 떠나는 사람을 위해 전별연을 베풀어 송별한다는 의미로, 그림의 제목과 풍경으로부터 도성 동쪽의 교외지역으로서 청량리 일대가 갖고 있는 장소성을 가늠할 수 있다.
근 현대로 접어들면서 광무 3년 도성과 청량리를 잇는 전차가 놓여졌고, 그 궤도를 따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청량리 일대는 부도심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중앙선, 경춘선 등 동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철도망이 건설되면서 서울과 한반도의 동부지역을 잇는 교통거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주변지역에서 생산된 청과물과 영동 산지지역에서 채집한 약재들을 거래하는 청량리시장, 경동시장, 약령시장 등의 시장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다른 역 주변도 그렇지만 청량리 역의 배후지역에는 지방에서 상경한 상인들이나 동부전선에서 휴가를 나온 군인들을 호객하는 집장 촌이 대규모로 형성되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588이라는 별칭도 갖게 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청량리 일대에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농업전문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등의 교육시설과 청량리 정신병원 등 의료시설이 입지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