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시기 백제의 한강유역 영유설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5.03.13
- 최종 저작일
- 2011.11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000원
![할인쿠폰받기](/images/v4/document/ico_det_coupon.gif)
목차
1. 머리말
2. 웅진백제의 한강유역 영유설에 대한 논쟁
1) 한강유역 영유 부정론
2) 한강유역 영유 긍정론
(1) 긍정론
(2) 한강유역 일시 수복설
3. 맺음말
본문내용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백제는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기반이 되었던 한성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천도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538년 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의 웅진기는 초기의 약화된 왕권으로 인한 정국의 혼란과 동성왕대의 국력회복, 무령왕·성왕대에 걸친 부흥으로 요약된다.
웅진기는 그 동안 백제 고대국가의 형성의 기반이 되었고, 이후에도 한반도 고대사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한강유역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고구려의 남하와 백제의 웅진천도는 한반도는 물론 주변에까지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 한성의 실함은 정치·경제·외교에 있어서 커다란 혼란을 가져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천도 이후에도 백제는 한강유역에 대한 관심을 버릴수가 없었던 것이며, 이를 수복하려는 노력이 웅진기 내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백제사 연구에 있어서 웅진기 한강유역의 상황과 관련된 문제는 중요하게 취급되어왔다. 문제의 핵심은 백제가 과연 웅진기에 한강유역을 실질적으로 영유하고 있었겠는가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보이는 ‘한성(漢城)’과 ‘한산성(漢山城)’관련 기사를 어떻게 보느냐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문헌사료들이 영성하여 논자들의 자의적인 추론이 불가피하였으며, 사료를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구체적이고도 자세한 견해들이 제시되었으며, 이를 통해 웅진기 한강유역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래에서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그 내용을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2. 웅진백제의 한강유역 영유설에 대한 논쟁
1) 한강유역 영유 부정론
웅진백제의 한강유역 영유 부정론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백제 한성 침공 이후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아산만 일대를 경계로 하여 고구려와 한동안 대치하다가 551년 성왕 때의 북진으로 한강유역을 탈환하였기 때문에 『삼국사기』한성 관련 기사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의견이다.
참고 자료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웅진도읍기의 백제』,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393~396쪽.
양기석,「475년 위례성 함락 직후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서경문화사, 2008, 59, 60~61,63쪽.
김영관, 「백제의 웅진천도 배경과 한성경영」,『충북사학』제11·12합집, 충북대학교사학회, 2000, 77~89쪽.
김병남, 「백제 동성왕대의 대외 진출과 영역의 확대」, 『한국사상과 문화』제22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03, 220~221쪽.
김현숙, 「웅진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서경문화사, 2008, 144~1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