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일생과 비평
- 최초 등록일
- 2015.03.22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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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광조>의 일생에 관한 글입니다. 여러 참고자료들을 이용하여 쓴 글이기에 퀄리티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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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없음
본문내용
조광조의 종손 조충남(趙忠男)은 퇴계 이황에게 조광조의 행장을 부탁하기 위해 퇴계 이황에게 찾아간다. 퇴계는 종손의 얼굴을 보니 어릴 적 보았던 조광조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한다. 위의 시는 조충남에게 적어준 시로 이황은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중종을 뵈올 때의 정암(조광조)를 유심히 본 일이 있는데, 그 걸음걸이가 마치 날개를 편 듯하고 위의(威儀)가 본받을 만 하였다. 한번 보자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라고 조광조의 당당한 풍채를 경탄했다. 봉황. 용과 더불어 신조(神鳥)로 여겨지며 임금을 상징하는 동물인데, 과연 조광조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황이 이런 감탄을 했던 것일까?
조광조는 1482년, 성종 13년 8월 10일(丙午)에 한양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광조의 자는 효직이고, 호는 정암이다.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으로 사헌부 감찰 조원강(元綱)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굉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조광조는 1510년 2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15년 조지서사지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에 알성문과에 급제한 이후 1518년 11월에는 사헌부 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개혁을 추진하다가 1519년 12월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기묘사화로 사사되었다.
그가 살던 당시에는 (15세기말 - 16세기 초) 연산군의 폭정과 2번의 사화(士禍), 중종반정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특히, 1498년(연산군 4년) 조광조가 17살이 되었을 때, 성종대에 어느 정도 세력이 조율되고 있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관계가 연산군의 폭정아래에서 혼란한 정국을 틈타 마침내 이들의 갈등이 표출되었고, 이로 인해 정국에는 한 번의 피바람이 분다.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하는데, 무오사화는 이극돈·유자광 등이『성종실록』의 편찬을 위해 김일손이 그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로 제출한 것을 구실로 하여 발생하였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폐위시킨 중국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의제를 애도하는 내용의 글로 되어 있다. 이는 과거에 일어났던 세조의 왕위승계(단종의 왕위찬탈과 폐위)가 유교적 명분에 어긋난다는 사림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참고 자료
「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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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장태, 퇴계평전 (인간의 길을 밝혀준 스승), (지식과교양),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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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趙光祖의 政治活動과 社會改革에 관한 硏究」,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이한조, 「靜庵 趙光祖의 改革思想에 關한 考察」,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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