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과 한국교회 - 1980년대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5.03.23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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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론
II. 통일문제에 대한 NCCK의 문제제기
III.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의 주체
Ⅳ. 도잔소 회의와 통일운동의 지평확대
Ⅴ. <민족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의 선언>에 있어 ‘평화’의 문제
Ⅵ. 결론
참고도서
본문내용
I. 서론
한국 교회가 민족 분단의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대응하여 통일 논의와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것은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 이후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반공적 입장 이외에는 이렇다 할 의견이나 주장을 갖지 못했다. 그 후 1970년대 김재준을 비롯한 진보적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민족의 실체인 민중의 참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밝힘으로 통일 논의를 한걸음 진보시켰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한국 교회의 대다수는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며 ‘선민주 후통일론’의 논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후 부패한 유신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1980년 민주사회를 기대하지만 한국교회의 민주화의 열망은 외세의 지원을 받은 새로운 군부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이에 한국교회는 민족 분단에 대한 근원적 요인의 인식(미국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됨)과 더불어 통일운동의 실천 방안들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198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분단국가로서 한국과 독일의 위상과 통일 전망을 논의하면서 구체적인 통일 문제에 대해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임수경의 판문점 통과는 그 극치를 이루었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국내의 부수세력을 부추겨 공안정국을 만들게 했으나 한 편에서는 ‘우리의 소원’을 남북한이 열창토록 하였다. 민간의 이 통일 열기는 남북한 당국자의 그 동안의 선전적인 통일 정책을 더 이상 용납치 않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통일의 열망이 무르익기까지는 한국교회의 노력과 선교자적 사명을 감당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NCCK를 중심으로 WCC와 연합하여 한국교회가 통일운동을 어떻게 주도하고 전개하였는지 살펴보며, 특히 도잔소 회의나, 글리온 회담,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회의 선언”에 나타난 평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김흥수, 서정민, 『한국기독교사 탐구』, 대한기독교서회, 2011
연규홍, 『교회사의 해방전통』, 한신대학교출판부, 200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 3』, 기독교문사, 2009
Wi Jo Kang, 서정민 역, 『한국기독교사와 정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