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천수대비가
- 최초 등록일
- 2015.03.26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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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원문과 현대어 풀이
2. 배경설화
3. 천수관음
4. 해석
참고문헌
본문내용
양주동 역
무릎을 곧추며
두 손바닥 모으와
천수 관음 전에
비옴은 두노이다!
천(千) 손에 천(千) 눈을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더옵기
둘 없는 내라
하나야 그으기 고치올러라
아으으 내게 끼쳐 주시면
놓되 쓰올 자비여 얼마나 큰고
<중 략>
禱千手觀音歌(도천수관음가), 千手觀音歌(천수관음가),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맹아득안가(盲兒得眼歌)>일명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라고도 하는 신라의 향가. 10구체의 노래로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분황사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에 이두문(吏讀文)으로 실려 있다.
희명의 아들이 생후 다섯 해 만에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희명이 분황사 좌전(左殿)에 있는 천수대비의 벽화 앞에서 아이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마침내 밝음을 얻었다는 유례가 있다. 전체 노래가 10구절로 나누어지므로 흔히 10구체 향가로 인정받고 있다. 향찰로 표기된 내용의 해독이 연구자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천수천안(千手千眼 : 천 개의 손과 그 손바닥마다 박혀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관음 앞에 합장하고 앉아 "두 눈이 없는 나에게 눈을 주신다면 그 자비로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하는 기원의 노래라는 데는 일치한다.
<중 략>
희명은 그의 아들이 눈이 멀자 천수대비상을 생각했다. 그것은 곧 천수관음에게 기원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그녀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희명에게 있어서 관세음보살은 아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위력의 존재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신라에 관음신앙이 유입된 것은 6세기 말경이다. 천수관음상이 들어 왔는가하면 관음사상의 모태가 되는 법화경이 이때를 전후해서 전래되었다. 일단 신라사회에 관음신앙이 들어오자 급속도로 일반화되었는데 그것은 관음신앙이 안고 있는 대중성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참고 자료
황패강,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연구(硏究)」, 한국불교연구원, 1991
최철, 「도천수대비가고(禱千手大悲歌考)」, 연세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1980
유창선, 「맹아득안가(盲兒得眼歌)」, 신동아, 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