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공간으로서의 교회
- 최초 등록일
- 2015.04.07
- 최종 저작일
- 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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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문화의 이원론을 극복하면서
3. 중간 시대(Interim)의 기관으로서의 교회
4. 도상에 있는 대화
5. 나가며
본문내용
20세기 서구의 문화역사 중의 대부분은 스노우(C. P. Snow)가 과학 문화와 문학 문화라는 “두 문화들”의 은유 안에서 잘 요약해 준 문화적 이원론의 특성을 보여왔다. 스노우가 1959년에 “두 문화들”을 대비시켰을 때, 그는 각각의 영역 안에서 활동 중인 태도의 상이한 집합들을 조명하였다. 문학적 세계가 전통적인 경전에 집착함으로써 제한되고 구속받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에, 과학의 세계는 새로운 엘리자베스 시대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세기 초에 비엔나 서클에 의하여 강력하게 옹호되었던 단일한 방법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통일된 과학의 개념은 버려진 지 오래이며, 오늘날에는 최근의 토론의 주제에 대해서 보가 과학철학의 역사에 대한 주제가 더 많이 언급되고 있다.
과학은 삶의 모든 영역을 침범하여, 현대의 정보 기술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하는 원고들도 대부분 워드프로세서로 쓰여 져서 전자 메일을 통하여 발행인에게 전달될 정도가 되었다. 문학문화는 현대의 통신 사회 안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된, 과학적으로 창조된 기술적 하위 체계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것에 의하여 지구촌 마을을 전자적 현실로 변화시키고 있다. 과학적 문화와 문학적 문화는 점점 더 각각의 자율성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이 단지 빈약한 수사학적인 성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그들 모두, 경제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유에서 어떤 종류의 과학이 실천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 그리고 어느 정도의 문학 문화의 여유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소위 경제적 “문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가까운 미래에 대하여는 신중하게 낙관적인 반면에, 먼 미래에 대해서 낙관주의를 전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과학의 발견 자체가 장기적인 낙관주의를 좌절시킨 것이다. 우주의 진화가 궁극적인 완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종적인 공허로 인도한다. 과학이 자신의 장엄한 야망의 궁극적인 좌절에 직면하여 어떤 현실적인 위로도 제공할 수 없는 곳에서,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