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지방제도
- 최초 등록일
- 2015.04.16
- 최종 저작일
- 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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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시대에 따른 지방제도의 변화
1. 한성시대의 지방제도
2. 웅진시대의 지방제도
3. 사비시대의 지방제도
Ⅲ. 결론
본문내용
고대국가에 대해서 공부할 때 흔히 국가의 전성기로 칭하는 시기가 각 국마다 있다. 이 때의 기준은 영토가 얼마나 최대한으로 확장되었는지이며, 거기에 따른 율령반포, 불교공인 등 국가를 정비하는데 필요한 제도들을 도입했느냐의 여부이다. 상대적으로 지방제도에 대한 관심은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방제도의 정비는 고대국가에 있어서 얼마나 진화된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느냐의 중요한 척도이다. 고대국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수많은 소국들이 존재하였으며, 그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중심으로 연립하여 만들어진 것이 초기국가였다.
<중 략>
지방제도를 실시하기 앞서서 있어야 할 관념은 바로 지방과 중앙의 구분이다. 지방과 중앙을 어떻게 구분했는지, 경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기사에 대한 신뢰성 문제이다. 국가의 중앙을 의미하는 도(都)가 이미 온조왕 13년 기사에 나와 있으나, 고이왕(古爾王, ? ~ 286) 이전의 기사를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온조왕(溫祚王, ? ~ 28)시기에 고고학적으로도 영토의 확장에 대한 증거가 보이지 않고 주변국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 시기의 기사는 대체로 3~4세기의 기사를 소급적용해 적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비류왕(比流王, ? ~ 344)10년 정월조에 남교(南郊)라는 용어인데 ‘교’는 도성의 교외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때부터 왕도에 대한 개념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 략>
고구려와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한성백제시대가 끝이 난 후, 백제는 웅진(熊津)으로 패퇴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웅진에서의 백제는 국가로써 기틀을 다시 정비하는 시기였으며 축소된 영토에서만큼은 다시 중앙정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담로제(擔魯)였으며, 담로에 파견된 자들은 왕족 및 왕권에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던 귀족들이었다. 정비가 어느 정도 완비가 된 후에, 옛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고구려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웅진은 수도로써 영향력을 끼칠 범주가 미미하였다. 이는 538년 성왕 재위기간 때 사비(泗沘)천도로 이어졌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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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상고사학회, 『百濟의 地方統治』, 학연문화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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