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와 서원 그리고 유교문화
- 최초 등록일
- 2015.06.10
- 최종 저작일
- 20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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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유교의 시작
2. 문학과 유교
3. 교육기관과 유교
4. 향교와 서원
5.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어지러웠던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에 공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상가가 있었다. 바로 유교의 창시자 공자다. 유교는 공자가 혼란스러운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한 데서 출발하였다. 공자는 무너진 사회질서는 주도층의 도덕적 실천을 통해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보고 군자의 덕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군주는 '덕'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 덕이란 인으로서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이겨 예(禮)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명한다.
<중 략>
유교의 흔적을 과거 시대 교육기관에서 찾다 보면 통일신라시대 이전, 즉 삼국시대에 이미 유교가 전파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경우 수도에 태학이라는 대학이 설치되었고 지방에는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을 두어 이 기관들을 통해 고구려 시대에 태학을 중수하고 학자를 우대하며 유교를 공부하고 장려했다고 기록 되어있다.
백제의 경우 박사제도를 두어 중국 왕조로부터 유교 경전을 수입하여 가르치고 왜에 학자를 파견하여 이를 전하고 가르쳐 주었다. 신라의 경우는 학자들이 스스로 제자를 가르치며 유교의 경전들을 읽히게 했고 통일신라 때는 국가에서 국학이란 교육기관을 두고 유교를 가르쳤다.
<중 략>
이황은 부임하자마자 이 곳에 재정지원을 해 줄 것을 나라에 상소하는데 이 건의로 국가에서 인정한 서원이라는 뜻에서 토지와 노비, 유교경전 등의 책과 소수서원 사액(賜額)을 받고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뒤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풍기 사림의 중심기구로 자리잡게 된다. 소수서원의 특징은 건물 배치인데, 보통의 교육기관이 전당후묘, 즉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을 배치한 데 반해 소수서원은 서쪽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를 따라 동쪽이 강학 공간, 서쪽이 제향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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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해, 『조선 유교건축의 풍수 미학』, 민속원, 2013.
공미라 외, 『한국사 개념사전』, 아울북, 2010.
한국학중앙연구원 편집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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