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개혁정치와 양요
- 최초 등록일
- 2015.06.18
- 최종 저작일
- 2014.10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000원
목차
1. 흥선대원군의 집권
2. 대원군의 내정개혁
1) 대원군의 인재등용
2)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3) 재정, 군사제도의 개혁
3. 대원군의 대외정책
1) 병인양요와 대응책
2) 신미양요와 대응책
참고문헌
본문내용
1. 흥선대원군의 집권.
1983년 12월 8일 33세의 젊은 철종이 재위 13년만에 후사도 없이 죽었다. 그의 소생으로 5남 6녀가 있었으나, 제 4녀 영혜옹주(永惠翁主) 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서 죽고 말았다. 왕위 계승자를 남기지 않은 채 왕이 죽었기 때문에, 신왕을 옹립하는 것이 초미의 급무로 떠올랐다.
이 날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대왕대비 조씨(趙氏)는 왕위 후계자를 선정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이 자리에서 조대비는 “흥선군(興宣君)의 嫡嗣(적사) 第二子 命福(명복)으로 익종대왕의 대통을 입승(入承)키로 정(定)하라”는 한글 교서를 내렸다.
자신의 아들이 왕에 즉위함에 따라 흥선군은 대원군에 봉착되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대원곤의 존재는 전례가 없었기에 그에 대한 예우는 대군의 예에 따라 시행되었다. 하지만 대군도 역시 종실이므로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직위는 아니었다. 따라서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봉작되었다고 해서 곧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2월 13일 고종이 즉위한 날, 대왕대비는 백관을 거느리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의 의례를 거행하였다. 대왕대비 조씨는 수렴청정의 권한을 갖기는 하였으나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이 약하였다. 그의 친정인 풍양 조씨 가문은 이미 철종 治世中(치세중)에 안동 김씨 세력에서 밀려서 영락하였고, 친정 조카인 조성하(趙成夏)· 조영하(趙寧夏) 등이 있었으나 척신으로서 세도의 지위에 올라 보좌의 중임을 감당하기에는 나이도 힘도 부족하였다. 대왕대비는 풍양 조씨 세력을 끌어 올리고 안동김씨 세력을 억제해 줄 강력한 존재로 필요로 하였는데, 흥선군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의 명목 아래 실제로는 흥선군에게 모든 정사를 위임하였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한 당시의 조선왕조의 국내외 정세는 복잡다난하였다. 국내적으로는 봉건왕조의 여러 모순이 말기적 현상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왕조 지배체제의 쇠퇴는 만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 자료
「한국사」37.서세동점과 문호개방. (국사편찬위원회)